한국의 한겨레신문 인터넷판은 2011년 3월 31일,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문제가 기재된 것과 관련해 「일본 독도전문가도 '다케시마(독도)고유영토론'은 잘못(日本 独島専門家も‘竹島固有の領土論゛は誤り)」이라 보도했다. 여기에는 외무성 비판을 지속하는 시마네(島根)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츄(内藤正中) 씨와 재일 독도운동가인 박병섭 씨와 함께 필자의 얼굴사진을 게재하고 「아무리 일본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우파학자라도 (일본의 독도)고유 영토론은 성립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며, 필자까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분명 2008년 말, 기사를 쓴 김도향 기자로부터는 3시간 정도 타쿠쇼쿠(拓殖)대학 근처 찻집에서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고유 영토론」에 관해서는 외무성의 견해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지만,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는 아니다, 라고는 말한 적이 없다. 당시 3시간 정도의 인터뷰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됐던 건 한국 측에는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한국 측에는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역사적 권원이 없다고 한 후, 일본 측의 다케시마(독도)연구에는 일본정부의 견해와 시마네현(및 필자)의 견해가 있다고 설명하고,「고유영토」에 대해서도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틀림없이 말했다. 이런 게 필자가 「고유 영토론은 성립하기 어려운 점을 인정했다」고 비약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왜냐하면 다케시마(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김도향 기자의 기사에서도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도향 기자는 시마네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츄 씨의 주장을 근거로 외무성의 고유영토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 나이토 세이츄 씨는 김도향 기자가 보도한 기사 중에 현재까지 독도(다케시마)가 「한국영토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며, 나이토 씨 자신도 아직도「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는 주장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이토 씨는 무엇을 근거로 외무성 비판을 한 것일까. 김도향 기자에 따르면, 나이토 세이츄 씨의 외무성 비판의 근거는 2가지 있다. 그 하나가 에도막부가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령으로 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했다」고 나이토 교수가 반박한 사실. 두 번째는 1877년의 태정관지령의 해석이다. 나이토 씨는 태정관지령의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를「1877년 3월,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와는 관계없음으로 명심하도록」이라 해석하여,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령이 아니라고 했다, 고 하고 있다. 나이토 세이츄 씨에 따르면, 에도막부가 다케시마(독도)를 조선령이라 하고, 메이지정부도 1877년 3월, 태정관지령으로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고유영토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나이토 씨의 역사이해는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다. 에도막부는 1696년 1월, 다케시마(竹島=울릉도)로의 도해금지를 돗토리번(鳥取藩)에 전달했지만, 이는 울릉도로의 도해금지로, 다케시마(竹島=독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측은 에도막부의 이 결정을 1696년 6월의 안용복에 의한 돗토리번령으로의 밀항사건과 연결 지어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 되었다, 고 역사교과서에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안용복의 밀항은 다케시마(竹島)로의 도해금지가 통달된 후로, 이미 에도막부는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두 집안에 부여한 도해면허를 반환시켰다. 하지만 밀항 후 조선으로 되돌아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돗토리번 요나고의 어민 등과 조우하고, 이를 쫓아 돗토리번까지 가서, 돗토리번에서는 번주(藩主)에게 항의하여 울릉도와 다케시마(독도)를 조선령으로 했다」고, 공술한 것이다. 한국 측은 이 안용복의 공술을 역사의 사실로 삼아 다케시마(독도)가 한국령이 된 역사적 근거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의 공술은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다. 울릉도로의 도해금지가 통달된 5개월 후, 돗토리번령으로 밀항해 온 안용복에 대해 에도막부의 지시를 받은 돗토리번은 안용복을 가로탄(加露灘)에서 추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환 후의 안용복은 조선 측의 취조에서 돗토리번주는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는 이미 조선령이 됐기 때문에 다시 경계를 넘는 자가 있거나, 쓰시마번(対馬藩)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한다면 국서(国書)를 작성하여 역관(訳官)을 보내준다면 엄중하게 벌하겠다」고 말했다며, 안용복의 귀국 시에도 식량과 호위를 위한 사자(使者)를 붙여주겠다고 했는데 이를 거절했다고 공술했다. 이 안용복의 공술은 일본사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위증(偽証)이라는 건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돗토리번이 막부를 대신해 영토교섭에 응할 리도 없고, 조선과의 외교창구는 쓰시마번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측에서는 일본 측의 사료(史料)를 정확하게 읽지 않고, 안용복의 공술만을 근거로 에도막부는 다케시마(독도)와 울릉도를 조선령으로 인정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토 세이츄 씨는 에도막부가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령으로 확인」했다고 하지만, 나이토 씨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이와 같은 일은 1877년 3월, 태정관이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에 대해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고 한 태정관지령의 해석에서도 말할 수 있다. 나이토 세이츄 씨는 1876년, 시마네현이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를 시마네현에 편입해야만 하는지, 중앙정부에 문의했을 때, 태정관은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영토와 관계없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는 나이토 씨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당시의 지도와 해도는 1840년 시볼트의 「일본전도(日本全図)」(사진1)의 영향을 받아 실재하지 않는 아르고노트섬에 다케시마(竹島)로 표기되고, 울릉도에는 마츠시마(松島)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하의 지도는 이진명 저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2005년 간행에서)

(【사진1】이진명 저『독도, 지리상의 재발견』에서. 한국어 타이틀에는 「1840년, 시볼트의 『일본전도』의 부분도(지도37-B)참조」라 되어 있다. )
이 시볼트의 「일본전도」로, 이후의 지도와 해도에서는 에도시대에 다케시마(竹島)로 불렸던 울릉도(欝陵島)가 마츠시마(松島)로 표기되게 된다. 이곳에 현재의 다케시마(독도)가 등장하는 건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인 리앙쿠르호를 통해 발견되어 리앙쿠르암초로 명명되고 나서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와 영국의 해도(사진2)에는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 여기에 리앙쿠르암초가 그려져 혼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2】이진명 저『독도, 지리상의 재발견』에서. 한국어 타이틀에는 「1863년, 영국해군해도 『일본-규슈, 시코쿠 및 한국 일부』의 부분도(지도48) 참조」라 되어 있다. 이 해도에서는 다케시마(竹島=아르고노트섬PD・pending/미정・미확정), 마츠시마(松島=다쥴레섬), 리앙쿠르암초가 그려져 있다)
태정관지령에서 「일본과 관계없다(本邦関係これなし)」고 된「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마츠시마=松島)」의 「다케시마(竹島)」와「외 한 섬(外一島)」이란, 당시의 지도상에서는 점선으로 그려진 미확정의 아르고노트섬(竹島)과 울릉도(松島)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도상의 마츠시마(松島)가 울릉도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태정관지령 3년 후인 1880년 9월에 실시한 천성함(天城艦)의 측량결과로 인해서다. 외무성 촉탁의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는 이 천성함의 수로보고를 참고로 1881년 8월에『죽도고증(竹島考証)』을 정리, 마츠시마(松島)를 울릉도로 하고, 울릉도 동쪽 약2킬로미터에 위치하는 죽서(竹嶼)를 죽도(竹島)라 했다. 1882년, 울릉 검찰사인 이규원은 「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를 작성할 때, 그때까지 우산도(于山島)라 표기되었던 죽서(竹嶼)에 다케시마(竹島)라 표기했다.
이는 시볼트의 「일본전도(日本全図)」에서 울릉도가 마츠시마(松島)로 표기된 이래, 이 지리적 인식이 해도와 지도에 정착했던 경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를 한국 측에서는 태정관지령의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의 다케시마(竹島)를 울릉도라 해석하고, 외 한 섬(外一島)을 에도시대 이래의 마츠시마(松島)로 하여 「태정관은 마츠시마(현재의 독도)를 일본령과는 관계없다고 했다」고 강변해왔다.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것이 시마네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츄 씨와 재일 독도운동가인 박병섭 씨다. 그러나 태정관은 마츠시마(松島=울릉도)는 일본령과는 관계없다고는 했지만, 이 안에는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이처럼 보면 나이토 세이츄 씨가 외무성 비판의 근거로 삼은 태정관지령도, 외무성의 「고유영토론」을 논박하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토 세이츄 씨가 「현재까지 일본 내의 자료에는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자료가 많다」며, 그 실례로 거론한『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1903년 간행)과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国実業指針)』(1904년 간행)에는 증거능력이 있을까. 김도향 기자는 이 나이토 씨의 설을 받아, 두 저서에는 「조선 강원도에 속하는 울릉도와 이에 부속하는 량코섬(독도)과 같은 기술이 나와 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한해통어지침』과『최신한국실업지침』도 외무성의 고유영토론을 비판하는 근거로는 사용할 수 없다. 『한해통어지침』에서는 한국의 판도를 「북위23도15분내지 42도25분, 동경124도30분내지 130도35분 사이에 위치(北緯23度15分乃至42度25分、東経124度30分乃至130度35分の間に位し)」한다고 하고, 『최신한국실업지침』에서는「그 위치, 북위23도15분부터 42도25분에 이르고, 동경124도30분에서 130도35분에 미친다(その位置、北緯23度15分より42度25分に至り、東経124度30分より130度35分に及ぶ)」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케시마(량코섬=독도)는 「북위37도9분30초, 동경131도55분(北緯37度9分30秒、東経131度55分)」에 위치하여 조선의 강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나이토 세이츄 씨 및 한국 측의 다케시마(독도)연구의 특징은 문헌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다케시마(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있다. 사실, 나이토 세이츄 씨가 「일본 내 자료에는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자료가 많다」고 하며 거론한 『한해통어지침』과『최신한국실업지침』도 나이토 세이츄 씨가 문헌의 일부만을 보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 측에서는 이 나이토 세이츄 씨의 주장을 못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외무성의 고유영토론을 비판하는 논거로 삼고 있지만, 나이토 씨 자신은 「현재까지 독도(다케시마)가 「한국영토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한국 측에는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역사적 권원은 없다고 하겠다.
이 자리를 빌려 「독도는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그건 역사의 사실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한국이 이웃나라의 영토를 침탈했다는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신속하게 일본에 반환하는 노력을 시작하는 일이다.
독도본부 2011.04.20 www.dokdocente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