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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섬(与那国島)에서 본 북방영토(상)

국경의 역학 

  ◇전쟁으로 생활권이 분단, 바다 맞은편의 풍요를 손에 넣기 위해 월경(越境)

 

 대학 연구자와 자치체 관계자들이 일본의 국경지역에 대한 미래상을 모색하는 「경계지역연구네트워크 JAPAN(境界地域研究ネットワークJAPAN)」세미나(홋카이도대학 글로벌COE프로그램 「경계연구의 거점형성」등이 주최)가 5월 14일~16일,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과 중화민국(대만)에서 개최된 것에 맞추어 현장을 방문했다. 요나구니섬은 일본 최서단의 국경으로 불과 111킬로미터 앞에 대만이 위치해있다. 약40년 전에 국교를 단절한 이웃나라. 영토문제를 안고 있는 북방사도와는 사정이 다소 다르지만, 하나였던 경제권이 전쟁으로 분단되어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게 됐다. 「가깝고도 먼 나라」의 현실을 요나구니에서 보았다.

 

 도쿄에서 직선거리로 2,000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다. 의료의 손길이 부족한 낙도를 테마로 한 드라마인 「닥터 코트 진료소(Dr・コトー診療所)」의 로케현장으로 알려지게 된 요나구니섬. 면적 약29만 평방킬로미터로, 대만의 10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1년에 여러 차례 후지산보다 해발이 높은 산들이 명확히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이전에는 섬 단독으로 독립했었지만, 17세기에 류큐왕국(琉球王国)에 편성되어, 1879년의 류큐처분으로 일본으로 합병됐다. 청일전쟁 후, 대만이 식민지화되고 부터는 생활물자의 거래와 취업, 취학도 행해져 하나 된 경제권을 형성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대만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점령 하에서 왕래는 단절. 한편으로 밀무역이 번성했다.

 

 「대만으로부터 설탕과 쌀, 가다랑어포를 운반, 오키나와로부터는 모포와 군복을 날랐다. 한 번의 항해로 적어도 6배는 벌었다」. 전후의 혼란기, 밀무역에 관계했다는 이 섬 구부라(久部良) 출신의 긴죠 시즈카(金城静子) 씨(86세)=나하시 거주(那覇市)= 는 회상한다. 오키나와와 본토의 대부분은 공습을 받아 폐허로 변했다. 특히 식량난이 심각해 대만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밀무역도 더 성행하게 되었다.

 

 대만은 「호우라이쌀(蓬莱米)」이라 불리는 질감과 맛이 뛰어난 쌀의 생산지로 일본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식량도 있었다. 귀국선에는 초토(焦土)・오키나와에 산처럼 있었던 약협(총포 탄환의 화약이 들어 있는 금속제 통) 등의 비철금속, 미군기지로부터 도둑질한 군복, 담배, 약품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성공하면 일확천금. 경찰과 군대의 눈을 피해 배로 편도 9~10시간 걸려 왕복했다」고 요나구니섬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마을 중 하나인, 소오우(蘇澳)에서 현재도 생활하고 있는 고우 하루오(黄春生/80세) 씨는 말한다. 이전에 밀무역 기지였던 난보우오우(南方澳)의 후미에는 막대한 수의 작은 배로 물자를 날랐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점차 연합국 등에 의한 감시와 적발도 엄해져 1949년의 일본과 류큐(현재의 오키나와)와의 무역협정으로 본토로부터의 일상품이 정식으로 수입 가능해지자, 밀무역은 쇠퇴해졌다. 밀무역이 가장 융성했던 때, 유동인구도 포함하면 1.5만 명이나 되었다는 섬의 인구는 현재 약1600명까지 감소. 대만 등과의 교역을 재개하려는 개항 시도도 8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요나구니로부터 3,000킬로미터 떨어진 네무로시(根室市). 북방영토는 종전부터 약2일 후에 밀고 들어온 소련군에게 빼앗겼다. 한편으로는 게 등의 수산자원을 목적으로 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을 소형 고속선으로 월경해 조업하는 「특공선박(特攻船)」과, 소련 측에 기밀정보 등을 넘기는 대가로 조업을 묵인해 받은 「레포선박(レポ船);일본 북방 주변 해역에서 구소련 경비정에 일본 자위대나 경찰,우익등의 정보 또는 물품을 넘겨주고 그 대신 금어구(禁漁區)에서 조업하는 것을 묵인 받고 있던 일본어선.*리포트선박의 준말」이 횡행했다. 90년대초 무렵까지 계속됐지만, 이 동안 나포된 어선은 1만3000척 이상, 9400명 가까이가 억류되었고, 이 가운데 총격으로 사망한 2명을 포함하면 총 31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나구니와 네무로(根室). 모두 전쟁으로 생활권이 분단되어 맞은편에는 각각 흘러넘치는 식량과 풍요로운 바다가 있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이시하라 마사이에(石原昌家)・오키나와 국제대학 명예교수(사회사)는 이것이 국경의 역학으로 「서민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였다고 생각된다」고 말한다. [북해도신문 2011.06.17]

독도본부 2011.06.22.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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