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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다카요시와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

다케시마문제연구고문 리포트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07.28

                             
서문 
 시마네현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의 질문코너에 「시마네현 사족(士族;메이지유신 이후, 에도시대의 구게(公家: 조정에 출사하는 사람. 궁정귀족)와 무사(武士) 가운데 화족(華族)과 졸족(卒族)이 되지 못한 자에게 부여된 신분계급의 족칭이다.[출처: 네이버백과] )인 도다 다카요시(戸田敬義)가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에 첨부했다는 지도는 현재 남아있는가요?」라는 등의 질문(「2010년 10월, 11월분 의견」의 질문1)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연구소 협력원 분이 그 2장의 지도는 동경 외무성 외교사료관(外交史料館), 그리고 복사본은 국립공문서관에 있다는 것과 구체적으로 질문의 하나였던 섬은 죽서(竹嶼)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1877년 시마네현 사족(士族) 도다 다카요시는 메이지 정부에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을 제출했다.

 도다 다카요시에 대해서는 조금 조사한 것도 있어 이 기회에 발표하고자 한다.

1、도다 다카요시에 대해
 도다 다카요시(戸田敬義)는 구 돗토리번사(鳥取藩士)지만 자신을 시마네현 사족(士族)이라 서명하고 있는 건 1876년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이 합병해 현재의 돗토리현도 시마네현이라 불렸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돗토리현립박물관에는 『도다 다카요시 집안 1582년~1873년(従天正十年至明治六年)』이라 표지에 기록된 도다집안의 족보(系図)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소장되어 있다. 1582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아래에서 활약한 도다 쇼자에몬(戸田庄左衛門)을 시조(始祖)로 하여 1873년 도다 다카요시(戸田敬義)가 돗토리번의 권대속(権大属)이란 직책에서 해직되기까지의 기록이다. 도다 다카요시는 도다집안의 10대째 가주(家主)로 1849년에 약관 8세로 가독을 계승했다. 돗토리번사(鳥取藩士)로서의 고쿠다카(石高; 근세 일본에서 고쿠(石 (こく) 석)라는 단위를 이용하여 토지의 생산성을 나타낸 수치를 말한다. 이에 의거하여 토지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영지 면적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에도 막부의 시기에 토지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각 토지와 전답, 가옥 부지의 생산성을 조사하기 위해 그 가치가 쌀로 몇 석인지 수량화하여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고쿠다카이다. 이후 무사가 영지에서 받게 되는 수입이나 봉록도 이 고쿠다카를 이용하여 그 양을 나타내었다.[출처: 위키백과])는 350석이었다. 도다 집안의 부지는 현재의 돗토리시 유도코로쵸(湯所町) 1쵸메에 해당하는 상급, 중급번사(藩士)가 거주했던 지역에 있었다.                         

 도다 다카요시의 기타 이력에 대해서는 그가 1873년에는 동경으로 올라와있었다는 사실이 전술한 『도다다카요시집안(戸田敬義家)』기록 말미에 「별지 동경에서 근무(후략)(別紙 東京在勤申付候事 同六年一月十七日)」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거주지는 처음에는 동경 제4대구(第四大区) 제2소구(第二小区) 스이도바시(水道橋) 내 미사키쵸(三崎町) 2쵸메(二丁目) 1번지, 화족인 (裏松良光) 씨 저택 내에서 살았으며, 1878년에는 동경 제6대구(第六大区) 고히나타(小日向) 묘가다니(茗荷谷町) 7번지에서 살았다고 되어있고, 후술의 오키나와현 관리를 퇴직하고 동경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동경 고이시가와구(小石川区) 히사가타쵸(久堅町) 74번지로 되어있다.                

 1876년 12월, 그는 원로원에 「各地方官ヲ御改メ内務本省ノ官員派出巡環事務ヲ提掌シ并地方ノ警察事務ヲ警察庁ニ掌リ同庁ノ員派出巡環細事形勢ニ至ル迄全国一途ニ御施行被為在度建言」을 제언했다(국립공문서관 소장). 취지서에 따르면 「前ニ佐賀ノ挙動、近キハ熊本、山口等ノ暴動ニ至ルモ其謀主ハ姦計ヲ胸中ニ隠シ細民ヲ誘導スルハ施政ヲ悪言スルノ他ナカルべシ」라며, 1874년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에 의한 사가의 난(佐賀の乱;사가에서 일어난 메이지정부에 대한 사족반란의 하나. ), 구마모토(熊本)의 신푸렌의 난(神風連の乱; 구마모토시에서 일어난 메이지정부에 대한 사족반란의 하나.), 하기의 난(萩の乱;야마구치현 하기에서 일어난 메이지정부에 대한 사족반란의 하나. )를 언급하며 중앙주도의 행정 및 경찰권 확립의 필요를 건언(建言)하고 있다. 이때 도다는 33세였다. 그리고 1877년 1월에는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을 제출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그 후의 도다의 소식은 류큐처분(琉球処分)으로 성립된 오키나와현의 관리로 때때로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1879년 이세나(伊是名)섬 등을 조사하고 현청에 보고하여 오키나와에 설치된 9개 구(区) 성립에 노력한 「도역소장(島役所長) 도다 다카요시(戸田敬義)」로 등장한다.           

 또한 전국의 현청직원의 지위와 임무를 기록한『직원록(職員録)』의 오키나와현 부분을 보면 1886년의 「제1부(第一部)」라는 부서에 판임관(判任官; 패전 전 일본에 있어서의 최하급의 관명. 주임관(奏任官)의 아래로 본속이 장관의 자의로 임면되었음.)4등(四等)에 도다의 이름이 있으며, 1891년과 1893년에는「내무부(内務部)」라는 부서에 제2과장(第二課長) 보좌 겸 나하2등 측후소장(心得兼那覇二等測候所長)으로 이름이 게재되어 있다. 동경도 공문서관에 소장되어 있는「1894년 기 문관 은급자명부(明治二十七年記 文官 恩給; 정부가 법정 조건을 갖추어 퇴직한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주던 연금者名簿)」에는 도다에 대해 오키나와현 소속으로 1894년 6월에 퇴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도다 다카요시의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에 대해
 도다는 1877년 1월, 동경부 지사인 구스모토 마사타카(楠本正隆(※))에게「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을 제출했다. 현재는 1881년 8월 외무성의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가 정리한 외무성기록『죽도고증(竹島考証)』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대략의 내용을 발췌해보면,

 「메이지유신 이후 북해도방면의 개척 움직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전에 읽었던 『죽도도해기(竹島渡海記)』가 떠올랐다. 34세인 지금 우리나라(일본)의 도서(属嶼)에 애착을 느껴 죽도(竹島)에 관한 것을 찾아본 결관, 2장의 서도(書図; 글과 그림)를 입수하고 오키(隠岐)의 고령자의 전언도 들었다. 지참했던 『죽도도해기』는 목하 동경으로 옮기는 혼란 등으로 찾지 못했지만, 막부가 텐보기(天保期;1830년부터 184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킴.) 무렵 감시역(目付け役)에게 죽도도해(竹島渡海)를 명하고 섬을 둘러보게 한 일도 있기 때문에 그 수행자가 편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 전언의 서(伝言の書) 등의 진위를 논하는 것보다 실제로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정부가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에 관리를 파견했다고 들었는데 정부가 개간에 힘을 쏟으려하는 건 기쁜 일로, 그에 따라 본인도 절해의 고도로 건너가 분골쇄신해 국익의 일익을 담당하고 싶은 마음임으로, 도해면허의 건을 허가해주셨으면 한다」

 등이 쓰여 있다.

 또한 도다는 정부로부터 허가가 나오지 않자, 3월 14일과 4월에도 청원을 제출했지만, 6월 8일, 동경부 지사의 이름으로「書面竹島渡航願之儀難聞届候事」라는 불허가 통지가 있었다.

 동경도 공문서관에 남아있는「明治十一年 往復録 庶務課戸籍掛」이란 문서에는 1878년 3월에 동경부 지사 구스모토 마사타카(楠本正隆) 앞으로 보낸 시마네현 권령(権令) 사카이 지로(境二郎)의 이름으로 도다 다카요시의 호적에 관한 서류 회송의뢰, 도다 다카요시로부터 구스모토 마사타카가 받았다는 것에 대한 통지, 구스모토 마사타카가 사카이 지로에게 「도다 다카요시로의 답변(寄留士族戸田敬義へ書類達し方の義につき御回答)」이 남아있다.  사카이 지로는 시마네현의 참사(参事)로 1876년 내무성에 「일본해 내 죽도외 한 섬 지적편찬 문의(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를 제출, 1881년에는 시마네현령으로 나카군(那賀郡) 아자이무라(浅井村)의 사족(士族)인 오오야 겐스케(大屋兼助) 외 1명의 「일본해 내 마츠시마 개간의 뜻에 부쳐 문의(日本海内松島開墾之儀ニ付伺)」를 내무성 및 농상무성에 제출한 인물이다.  

 그럼「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을 총괄해보면 주위의 사회적 동향에 따른 청원이지만, 과거에 읽은 「죽도도해기(竹島渡海記)」존재가 컸음으로 알 수 있다. 「죽도도해기」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텐보기(天保期) 무렵의 것이라 되어 있어 이마즈야 하치에몬(今津屋八右衛門)의 구술서인 『죽도도해1건기(竹嶋渡海一件記)』일 가능성이 있다. 「막부가 감시역(目付け役)에게 명해 섬을 둘러보게 했다」고 도다는 쓰고 있는데, 하치에몬(八右衛門)은 하마다번(浜田藩)의 번주(藩主)로 막부의 필두로쥬(筆頭老中; 에도막부의 쇼군의 직속으로 정무를 담당하던 최고 책임자중의 대표.)인 마츠다이라 스오노가미야스토우(松平周防守康任)의 지시 등을 수없이 말하고 있어, 도다의 기억에 하치에몬이 스오노가미야스토우(周防守康任)의 명령으로 섬으로 건너갔다는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에 첨부된「죽도지도(竹島之図)」가 하치에몬이 쓴 것을 원본으로 하고 있는 것을 추측되어지는 것과도 관계된다고 생각된다.

3、「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에 첨부된「죽도지도(竹島之図)」에 대해  
 도다의 「죽도도해지원」중에「2장의 도서를 입수(二葉ノ書図ヲ入手)」, 「도획; (그림).은 제작년 호키의 한 어부의 집안에서 구함(図画ハ一昨年伯耆ノ一漁師ノ家二求ム)」이라는 기재가 있다. 그리고 외교사료관에는 「시마네현 사족 도다 다카요시 청원서 첨부/ 죽도지도 2장(島根縣士族戸田敬義願書添/竹島之図弐葉)」이라 쓰인 봉투와 그 2장의 「죽도지도」가 있다고 한다. 실은 우리는 2006년 국립공문서관에서 같은 2장의 지도를 발견하고 발표도 해왔다. 이번 외교사료관에 도다 다카요시의 「죽도지도」가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연구자로부터 그 데이터를 받았기에 비교해보았다. 국립공문서관의 젓은 「1877년 8월 모사(明治十年八月模写)」라 되어 있어 도다의 「죽도도해지원」은 1877년 1월에 제출하였기 때문에 국립공무서관의 것은 복사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분명 외교사료관의 것은 「죽도지도」라고 2장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국립공문서관의 것은 「죽도지도(竹嶋之図)」라 기록된 것과 선명함 등에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2장의 지도의 안쪽 모두에 「갑(甲)」이라 기록된 것은 1835년 오키(隠岐)에서 기촌(崎村)의 원태부(圓太夫)가 하치에몬이 지참했던 「죽도지도」를 하치에몬으로부터 직접 필사해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갑(甲)」에는「天保四巳霜月十九日若 持主権吉」이라고도 되어 있다. 하치에몬은 같은 해인 1833년 8월 15일에 하마다(浜田)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오고 나서 수개월 후에 필사해 받은 것이다. 이 「죽도지도」의 주인은 권길(権吉)이라고 되어 있는데, 하치에몬과 함께 이 해에 죽도도해를 한 관계자 중에 권길(権吉)이라는 인물은 없다. 도다가 「도획은 재작년 호키의 한 어부의 집안에서 구함(図画ハ一昨年伯耆ノ一漁師ノ家に求ム)」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집과 주인인 권질(権吉)과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을(乙)」의「죽도지도」는 죽도(竹島)의 내부를 옅은 청색의 완만한 산을 수많이 그리고, 해안의 암초부분을 옅은 갈색의 바위덩어리로 표현하고, 기재도 동서남북의 방향, 강, 산, 모래사장과 리(里), 정(丁)의 거리 정도의 간단한 것으로, 죽도(竹島)의 형태도 대략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다. 다만, 「五拾間斗立岩三つ、海中ニ有」로 쓰여 있는 이른바, 三本立岩과 「此嶌廻リ壱リ半」로 쓰여 섬 매에 나무들도 표현되어 죽서(竹嶼)로 여겨지는 섬 등은 인상에 남는 지도다. 이 「을(乙)」의 지도는『죽도고증(竹島考証)』에 외무성 기록국장인 와타나베 히로모토(渡邊洪基)가 당시 혼란을 겪고 있던 죽도(竹島), 송도(松島)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송도지의(松島之儀)」부분에「도다 다카요시의 지도(중략)(戸田敬義ノ図(中略)図中南隅ニ一里半周囲ノ一島ヲ載ス是于人島ナルべシ)」라며 이 지도도 참고로 삼아 생각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1 「도다 다카요시집안」계보 (돗토리현립박물관 소장)  


▲사진2 도다 다카요시가 도쿄부(東京府) 지사인 구스모토 마사타카(楠本正隆)에게 보낸 서간 (동경도 공무서관 소장) 


▲사진3 「죽도지도(竹島之図)」갑(甲)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사료)  


▲사진4 「죽도지도(竹島之図)」을(乙)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자료) 

 

 

독도본부2011.09.1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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