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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윤과 호슈의 우정

국경 초월 100여 년 '성신 교류'…꼬인 한일관계 다시 성의와 신뢰로 풀자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조선회도' 속의 성신당 건물 모습.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4>

- 조선통신사 역관이었던 현덕윤
- 역관숙소 고쳐 '성신당'으로 이름
- 日 외교관 호슈, '성신당기' 선물
- 진심으로 교감 나누자는 의미
- 3대에 걸쳐 진한 우정 쌓아 

- 지금은 외교 꽃핀 자리 흔적 없고
- 무관심에 공덕비조차 행적 감춰
- 자취 찾는 일본인들에 부끄러워

앞 이마가 훤한 할아버지 한 분이 일행과 함께 헉헉대며 산길을 올라갔다. 그가 쓰는 유창한 일본말이 아니었다면 한국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안내를 받아 이윽고 산자락의 묘소에 도착한 이들은 옷깃을 여미고 가볍게 참배를 했다. 모두 잊고 있던 역사의 한 고리를 찾은 듯 표정이 진지했다.

묘소의 비석 앞면엔 '嘉善大夫行龍驥衛副護軍 玄公諱德潤之墓(가선대부행용기위부호군 현공위덕윤지묘)'라 돼 있고, 뒷면 첫줄에는 '國家置訓導官釜山(국가치훈도관부산)'이란 글이 적혔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2품 품계를 말하고, 용기위는 중앙군사조직인 종4품 좌위(左衛)를 일컫는다. 행(行)한다는 것은 상·하위직 겸무를 의미한다. 그의 직무는 묘갈명 첫줄에 나온대로 국가공무원격인 부산 훈도관이다. 훈도는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맡던 교관. 부산 훈도는 왜관의 사신 접대 및 교섭이 주임무라 흔히 왜학훈도라 불렸다. 여러 소임을 맡은 현덕윤, 그는 누구던가. 일본인들이 왜 그를 찾았던가.

대마도에서 온 손님     
 
그날 현덕윤의 묘소를 방문한 이는 일본 대마도의 향토사가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 옹이었다. 대마도 연구의 1인자로 지한파이기도 한 그는 부산에서 열린 '호슈외교교류회' 행사에 왔다가 벼른 듯 현덕윤의 묘소를 찾았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대마도 출신의 유학자이자 외교가로, 현덕윤과 3대에 걸쳐 100여년간 교류를 쌓아온 인물이다. 이들의 국경을 초월한 우정은 나가도메 옹의 연구욕을 자극했다.

당시 나가도메 옹을 안내한 초량왜관연구회 최차호 회장은 슬픈 소식 하나를 먼저 전했다. "지난 4월 나가도메 선생이 95세를 일기로 별세했어요. 영향력이 컸던 분이라 돌아가시기 전에 부산과 일본의 민간 교류를 발전시키는 징검다리 하나를 놓았어야 했는데…."

나가도메 옹은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대마도 연구에 매진해 '대마국지' '아메노모리 호슈' 등 수십 권의 책을 남겼다. 그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업적을 현창하는 '호슈회(芳洲會)'를 만들었으며, 조선통신사 사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대마도에 세워져 있는 최익현 순국비, 조선통신사비, 성신지교린비, 고려문, 통신사 김성일 시비,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등 한국관련 비석에는 거의 대부분 나가도메 옹의 손길이 닿아 있다. 2010년 대마도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즈하라의 수선사(修善寺) 경내에 세워진 '항일투사 최익현 선생 순국비'에 대한 건립 배경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의 고유 문화는 비록 적장이라도 의롭고 존경할 만하면 무공을 칭송해 주었다. 최익현 선생이 그런 분이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게 일본이었다.

2012년 대마도에 있던 한국 불상 2점을 한국인이 훔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내에서는 그것을 왜구의 약탈품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가도메 옹은 '도둑맞은 불상'이란 책자를 통해 과거 대마도 도주들이 고려에 진주와 수은을 보내는 대신 불상과 경전을 받았다는 기록을 제시하며 "양국 간 교역의 산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따를 수 있지만 그의 자세는 늘 학구적이었다. 그런 그가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호슈와 현덕윤이었다.

성신당을 세우다

현덕윤(1676~1737)이 출사역관(出使譯官)으로 초량왜관에 부임한 건 1709년(숙종35),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그의 풍모에 대해 묘갈명에는 '시에 능하고 초서, 예서 등 글씨가 탁월하였다. 관대 후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목소리는 큰 쇠북과 같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관방지대인 부산에 도착해 왜관을 돌아본 그는 크게 실망했다. 대일 외교 실무자들이 거주하는 건물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낡고 허름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동래부사 권이진이 긴급 보수를 명하자 현덕윤은 사재 수백냥을 내놓고 일을 도왔다.

현덕윤은 1711년 제8차 조선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을 방문했고, 1718년(숙종44)엔 품계가 올라 문위역관사(問慰譯官使)로 대마도를 다녀왔다. 이듬해 제9차 통신사 때는 대마도에 들어가 실무를 협의했다. 일본 방문 횟수가 늘면서 그의 외교감각도 자연 배양됐다.

1725년(영조 원년) 여름, 다시 동래에 부임한 현덕윤은 빈일헌(賓日軒) 유원관(柔遠館) 등 역관들의 숙소 등이 여전히 낡고 초라한 것을 알고 대대적인 개축과 보수를 건의했다. 조정과 동래부, 통신사들이 지지하자 그는 또 사재를 털어 건물 16칸을 수리하고 68칸을 신축했다. 공사 중에는 가급적 주민들의 공역을 줄이려 애를 썼다.

공사가 끝나자 현덕윤은 훈도 청사의 당호를 '성신'(誠信)이라 짓고 직접 편액을 썼다. 그가 남긴 '성신당기'에는 역관으로서의 자부심과 성신의 가치 구현, 평화에의 기대가 잘 나타나 있다.

1729년 훈도 임기가 끝났으나 동래부사는 현덕윤을 놓아주지 않았다. 1년 유임이 결정되자 그는 마무리되지 않은 역관 건물을 수리하고 다듬는데 진력했다. 한편으로는 공작미와 진상품, 사절파견 등을 놓고 대마번의 호슈를 상대로 외교 교섭을 벌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섭이 길어지고 일본측 입장을 너무 헤아린다 하여 곤장을 친 반면, 대마도 측은 현덕윤의 공을 헤아려 포상하는 일도 있었다.

왜관의 임무를 마치고 퇴직할 때 누구보다 아쉬워 한 사람은 초량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현덕윤의 업적을 칭송하기위해 1731년 공덕비를 세웠다.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고(待人以誠)/ 어짊으로 사물을 접하니(接物以仁)/ 관방의 땅에 공적이 크고(功大關防)/ 은혜가 고을 백성에게 젖어 들었네(惠洽鄕民)'. 역관 훈도에 대한 최초의 공덕비였다.


사라진 공덕비

1711년 통신사 역관으로 호슈와 함께 일본을 찾았던 현덕윤은 19년 뒤 부산에서 그와 재회한다. 현덕윤이 사재를 털어 역관 숙소를 고치고 그곳에 '성신당'이란 편액을 붙인 사실을 안 호슈는 탄복하여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써 현덕윤에게 준다.

'…경치 좋은 곳에서 경치를 찾지 않고 성신이라 이름한 뜻이 가상하다. 교린(交隣)의 길은 성신에 있고, 지금은 물론 훗날에도 그리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당을 보고 교린의 책임자가 된 사람, 그를 깊이 생각하노라.' 

호슈의 외교철학은 성신교린(誠信交隣)이란 말로 요약된다.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심으로 교류하자는 의미다. 현덕윤과 깊이 통한 것도 바로 성신에 대한 이해와 교감 때문이었다. 이들의 성신 교류가 꽃핀 자리가 바로 성신당이다. 그곳이 중구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인근이라 하는데, 아쉽게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초량 주민들이 세웠다는 현덕윤 공덕비도 행방이 묘연하다.

노부하라 오사무(信原修·78·전 도시샤대학 교수)라는 일본인 학자가 현덕윤의 공덕비와 자취를 찾기 위해 한국을 20여 차례 방문하고 논문을 썼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연주(延州) 현씨 문중에 현덕윤에 대한 자료가 많다는 데도 우리 학계에선 별무관심이다.

성신, 한일 현안을 푸는 열쇠

성신(誠信). 성의와 신뢰. 이 좋은 말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거론되지 않고 일본, 특히 대마도의 상징어처럼 된 것은 균형 상실이다. 1726년 현덕윤이 호슈에게 보낸 간찰에는 '兩國誠信之間(양국성신지간)'이란 엄연한 문구가 나온다. 성신이란 말이 당시 말단 역관부터 대신, 임금까지 공유한 정치사상이었던 것이다. 이게 몇 년 뒤 성신당 당호로 걸리고 주민들이 공감했으니 그 가치가 가볍다 할 것인가. 

1990년 방일한 노태우 대통령이 일왕과의 만찬 자리에서 호슈와 현덕윤의 '성신지교'를 소개하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사실은 놓쳐선 안될 일화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성신의 가치가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얘기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 독도 영유권 고집, 아베 총리의 보수우경화 등 한일 간에는 풀리는 일보다 꼬인 일들이 더 많다. 2012년 대마도에서 터진 불상 도난사건은 서로 믿지 못해 해결책을 못찾고 있는 경우다. 해방 70년을 맞았건만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이, 일본에서는 혐한감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일 시민단체가 추진하던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작업도 멈춰 있다. 양국의 성의와 신뢰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다.
 
280여년 전 현덕윤과 호슈의 우정, 이들이 가슴에 새기고 나눈 성신의 의미를 꺼내 새롭게 닦아볼 일이다. [국제신문 2015.06.03]

독도본부 2015.06.0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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