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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우리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재소환 할수 있을까'

의병 꾸렸다 일본에 나포, 4년만인 1600년 돌아와

당시 체험 기록한 건거록, 제자들이 간양록으로 고쳐


 황종하 작 소무목양도.(蘇武牧羊圖, 호림박물관 소장)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양 어양 어양 어양 어허어 어~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을 들으며

1980년대 MBC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주제곡으로도 불렸다. KBS 역사스페셜로도 다루었다. 수은 강항, 그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남도땅 영광사람이라는 점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수은집'이 대표 저서다. 강항의 호 수은(睡隱)은 은거를 지향하는 강항의 의지이자 다짐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영광에 은거하며 서남해 인근의 남도 사람들을 길러냈다. '간양록'은 1597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1600년 5월 귀국하기까지 겪었던 체험과 정보를 기록한 글이다. 본래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에서 '건거록(巾車錄)'이라 이름 붙였다. 반백년 후인 1654년 제자 동토 윤순거(尹舜擧)가 원고를 정리하면서 '간양록'으로 바꿨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수은 강항의 저작과 활동

강항은 1567년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태어나 1618년 52세로 세상을 떴다. 고향 영광에서 교육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후학들에 의해 편찬된 '수은집'은 1658년의 4권 4책 목판본이다. '간양록'은 수은집의 4권에 수록되어 있다. '巾車錄'에는 16세말에서 17세기 초에 해당하는 일본의 상세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영광지역의 방어체계, 해안지역 수군진보의 설치와 운영, 전선 건조, 수군 훈련, 전공자에 대한 예우, 변방의 장수에게 지급한 식읍(食邑), 도서지역의 어염과 토지 등 방대한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운제록(雲堤錄)'과 '수은집(睡隱集)'은 영광군 금계리 유봉마을과 운제마을에서 작성되었다. 수은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영광임진수성록(靈光壬辰守城錄)'은 영광 유림들이 읍성을 사수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결성한 지방조직에 대한 기록이다. 대일관계나 조선의 제도, 남도지역을 연구하는데 긴요한 저작들이다.

일본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다

강항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의병을 꾸렸다가 일본에 나포되었고 햇수로 4년만인 1600년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보고 들은 바를 적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을 지어 왕에게 올렸다. 적중문견록은 당시의 일본 통치체제나 지도를 포함 군대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다시 벼슬을 하거나 중용되지는 못했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임금은 술을 하사 하면서 왜나라의 실정을 묻고 벼슬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당시 조정의 의론에 꺾여서 폐고 되었다"고 했다. 강항이 고향에 내려와 은거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했다고도 주장한다. 어쨌든 이를 왜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왔다는 부정적인 시각이나 차별의식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 해석한다.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고려 때의 환향녀(還鄕女)에 비유하기도 한다. 왜나라의 실정에 가장 밝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서용되어야 했는데 심지어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는 것. 당대의 정치 환경을 아쉬워하거나 토로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기를 거듭할수록 강항에 대한 충절의 의미는 확장된다. 가히 충절의 아이콘이라고나 할까. 절의를 지킨 선비라는 평가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확대되어 왔다.

은거의'수은(睡隱)'에서 충절의 '간양(看羊)'으로

강항이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1668년(현종 9년) 의병장 김덕령과 함께 절개를 지킨 선비라는 뜻의 참의(參議)에 추증되면서부터 아닐까. 이후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인물의 의미로 거듭 재구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안석경이 펴낸 '강항전'에서 "비록 시대가 지나고 형세가 바뀌어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 하더라도 강항이 지적한 바는 의거할 만하고 제기한 방책은 채택할 만한 것이 많다. 이에 '간양록'을 자세히 살펴 강항을 위해 전을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간양이라는 제호를 택했을까? 간양(看羊)은 중국 한나라의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을 때 굴복하지 않고 18년간 양을 치며 절개를 지켰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100년 한무제 시절의 얘기다. 흉노왕이 소무를 추방할 때 숫양들을 가리키며 "이 놈들이 새끼를 낳는 날 너를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숫양이 새끼를 낳는 날이라니. 보내주지 않겠다는 뜻이렷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는 것 아닌가. 여기서 소무목양(蘇武牧羊), 소무가 양을 친다는 고사가 나왔다. 대개 이 고사의 차용은 이민족의 회유에 굴하지 않는 충절을 끄집어내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제자들이 간양록이라 이름을 고친 까닭이기도 하다. 수은이 일본에 나포되어 2년 8개월을 묶여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했다는 의미이리라.

'소무목양(蘇武牧羊)'의 충절과 의미의 재구성

이 고사는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 여러 장르에 걸쳐 인용되었다. 임백년은 '소무목양도(고궁박물원 소장)'에 "몸은 십리양장(조계지)에 있지만 이역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身居十里洋場 無異置身異域)"라고 썼다. 무슨 말인가? 최경현은 이를 일러 당시 상해가 서양의 도시로 급변해 가는 상황을 염려했던 중국인의 반서구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1920년 조석진이 그린 '고사인물도' 10폭 병풍 가운데 여섯 번째의 '해상목양(海上牧羊)'도 동일한 사례다. 한절(漢節)을 든 '소무'가 두 마리 양과 함께 파도치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기왕의 '소무목양'을 상해의 상황에 빗대어 그렸다는 것이다. 황종하가 그린 '소무목양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무목양'은 일본이 세웠던 만주국의 애국가 멜로디로도 차용되었다. 김일성도 빨치산 활동 당시에 이 시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이를 인용하거나 소지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사례도 있다. 모두 절의나 우국충절 등을 모티브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조용필의 '간양록'을 들으며

조용필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우국충절을 도모해서가 아니다. 강항의 제자들이 그를 양치기하던 '소무'로 만들고자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이 스스로 기록한 정보들은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사사화(私事화)의 내력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이를 은닉할 것이고 우직한 사람이라면 이를 드러낼 뿐. 역사적 인물은 '사실(팩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재평가되고 재구성된다. 시대의 요청이나 수요가 있을 때 그러하다. 박정희정권 때 이순신이 호국의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소환되었던 것이나 또 하나의 고려였던 삼별초가 의미심장하게 호출된 것들이 사례다. 그래서다. 강항을 우리 시대 어떤 모습으로 재소환 할 수 있을까? 결국은 강항의 제자들이 '소무목양'의 고사를 들어 '간양'으로 호출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끄집어내거나 평가하는 것은 당대의 수요가 결정하는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역사 속의 누구를 불러내든 그것이 우리 후세들이 동의하고 경청할 그래서 부끄럽지 않을 명분과 실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조용필의 '간양록'을 반복해서 묵상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전남일보 2017. 06.16.]


[남도인문학 TIP ] 수은 강항의 생애와 현창사업

수은 강항은 1567년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아버지 극검과 어머니 영동 김씨(통덕랑 선손의 딸)사이에서 태어났다. 강항의 고조 강학손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영광으로 유배되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영광 정착의 시발이었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한다. 16세에 향시, 22세(1588년, 선조 2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부터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 등을 거쳐 1596년(30세)에 공조와 형조의 좌랑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인이었던 형 준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관직에 나간 후로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따라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이며 정치적으로는 서인계라고 할 수 있다.

1597년(31세) 정유재란이 발생하였다. 강항은 남원에서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종사관을 맡았다. 원균의 수군이 한산도에서 패하였다. 육군도 남원성 전투에서 패하였다. 강항은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이내 흩어져 버렸다. 왜군이 영광을 침입하였다. 가족을 태우고 이순신이 있는 통제영으로 향하던 중 왜군을 만났다. 1597년 9월 24일 지휘자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와 이키(壹岐)를 거쳐 시코쿠(四國) 이요(伊豫)로 연행되었다. 임란이 끝나고 도도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오사카를 거쳐 후시미(伏見)로 이송되었다. 일본에 잡혀있는 동안 여섯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1600년 4월 후시미의 영주 사도(佐渡)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을 허락받았다. 일행 30여명과 후시미를 출발 대마도를 거쳐 1600년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2년 8개월만이었다.

일본 에이메현(愛媛?) 오즈시(大洲市)의 경우 강항 선생 연구회 등을 조직해 현창사업을 하고 있다. 영광군과 교류하며 우호증진 사업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강항이 일본에 성리학을 전달했다는 뜻에서 성리학의 아버지 혹은 비조로 추앙하기도 한다. 사서오경,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통서 등의 정주학과 과거제도, 석전제례, 향음주례 등이 주 내용이다. 강항이 유교를 일본에 가르쳐 일본 유교의 근본이 되었다는 오즈시의 현창비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초등학교 교재에도 등장한다. 영암사람 왕인이 일본에 한자를 전달했다 하고 영광사람 강항이 일본에 유학을 전달했다는 사실관계도 체크해둘 일이다. [이윤선 인문학 시민기자, 남도민속학회장 ]

독도본부 2017.06.19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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