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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 1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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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100년 만에 귀향?

북관대첩비 100년 만에 귀향?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비운의 임진왜란 전승비… 남북 협력으로 ‘환수’ 급물살

한편의 역사 미스터리가 드라마틱하게 풀리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공적비가 100여년 후에야 세워진 것만도 기막힌 일인데 그 비석이 수많은 곡절 끝에 100년 만에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전공을 기록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잘하면 광복 60주년 기념일을 전후해서 일본에서 ‘환국’할 예정이다. 홍윤식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기획단장은 “일본 측과 마무리 협상중”이라며 “이번 광복절 이전에 환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관대첩비 환수는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51개 중점사업 가운데서도 특히 역점을 두고 있는 15개 주요사업 중 하나다. 그만큼 의미가 큰 사업이다. 윤 단장은 “북관대첩비 환수는 단순히 문화재를 되찾는데 그치지 않고 빼앗긴 민족혼을 환수·복원하는 의미를 지닌다”며 “지난 1세기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드라마틱한 운명의 의병장

북관대첩비의 운명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편의 드라마처럼 기구하다. 우선 세워진 과정부터가 그렇다. 일본에 반출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내막은 물론 그 사실을 발견하고 환수작업을 벌여온 과정까지도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북관대첩비는 1709년(숙종 35년)에 건립됐다. 정문부가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은 때는 그로부터 4년 후(1713년)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최근 KBS 역사극 ‘불멸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을 다뤘다. 이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궤멸되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실제로는 13척)며 이를 이끌고 명량해전에서 승리, 제해권을 되찾은 얘기는 유명하다. 악조건 속에서 큰 승리를 낚고, 조정이나 주변의 질시로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점 등이 ‘바다의 충무공’과 ‘육지의 충의공’이 닮은 점이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에서 왜군을 몰아내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관북 또는 북관으로 불린 함경도는 당시 최악의 조건이었다. 관군이 연전연패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왜군과 내통했다. 국경인·국세필 등은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신하들을 포박해 왜적에게 넘겨주었다. 왜군과 반민(叛民)이 장악한 함경도에서 관리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시 28세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낮은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민의에 부응해 그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의 의병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남쪽에서 압박하는 왜군은 물론 안으로는 동포 반민 세력, 그리고 북쪽으로는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여진족까지 상대해야 했다. 의병부대는 백성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고, 적장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으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1592년 9월에 거병한 정문부의 북관의병은 6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반적 무리를 소탕하고 왜군을 함경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명장 휘하의 정예부대가 정규군도 아닌 의병부대에, 그것도 문관 출신의 하급 무관이 구사한 작전에 밀려 패퇴했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역사적 치욕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강탈당해

하지만 충무공에게 원균이 있었다면 충의공에게는 윤탁연이 있었다. 북관의 최고 관직자인 북변순찰사 윤탁연은 조정에 왜곡된 보고를 계속 올려 정문부의 공을 깎아내렸다. 그 결과 반적 괴수 국세필을 주살한 공만 인정되어 영흥부사에 제수되는 데 그쳤다. 더욱이 당시 혼탁한 당쟁의 와중에 무고로 투옥되기까지 했다. 박래장 역모사건에서는 무죄가 밝혀졌지만 창원부사 재직 시절 지은 초회왕(楚懷王)의 고사를 읊은 시 한수를 문제삼아 계속 악형을 가해 끝내 죽게 하고 말았다. 구국의 영웅에게 안겨준 것이 결국 역적 누명과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함북지방민의 송원에 의해 사후 44년 만인 1666년(현종 7년)에야 신원됐다. 생전에 조명받지 못했던 그의 전공도 사후에 서서히 드러나 숙종조에 이르러서야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주민의 뜻을 모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북관대첩이란 경성·장평·임명·단천·백탑교전투 등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왜군을 격퇴한 8차례의 전투를 통칭하는 말이다. 북관대첩비는 높이 187㎝, 폭 66㎝, 두께 13㎝의 비신에 한문으로 이를 기리는 1500여자의 비문을 새긴 것이다. 비문의 정식 이름은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또 한 차례 기구한 운명에 처한다. 러일전쟁 때인 1905년 함경도에 진주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제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이 비석을 파내서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케다 소장이 일본의 패전기록을 수치스럽게 여겨 주민들을 협박, 강탈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관대첩비는 히로시마를 거쳐 도쿄로 이송돼 궁성내 진천부(振天府)에 진열됐다가 ‘군국 일본’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져 한 구석에 방치됐다. 자연석으로 비대를 받치고 비모를 씌워놓았지만 비모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돌이라 의도적으로 비에 서린 기를 짓누르기 위해 올려놓은 듯 보인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비를 발견한 한국인은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이었다. 190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에 비의 발견 경위와 비문 전문, 애통한 소감을 ‘소해생’이라는 이름으로 투고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과 분단을 거치면서 이 비의 존재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북관대첩비가 다시 세상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65년 후다.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씨가 조소앙의 기록을 접하고 이를 근거로 야스쿠니 신사 경내를 샅샅이 뒤져 비를 찾아내면서였다. 이때부터 정문부의 후손인 해주정씨대종친회 등 민간 차원에서 반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28년째 계속되고 있는 북관대첩비 반환운동 과정은 마치 한일관계, 남북관계, 민관관계의 적나라한 실상을 대하는 듯하다. 단지 문화재를 되찾는다는 현실적 의미와 민족혼을 복원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안팎의 꼬이고 꼬인 숙제를 풀고 있는 듯하다.

북관대첩비의 원 소재지는 북한이다. 그런데 반환을 요구하는 측은 한국이다. 일본은 이 점을 이용해 비의 반환을 계속 미뤄왔다. 또 하나는 비의 현 소재지가 야스쿠니 신사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민간 소유 재산이라는 점을 들어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고,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등 서로 책임을 회피했다.



원래 있던 북한 땅에 복원 계획

최근 일본 정부는 “남북이 합의해 한국 측이 정식으로 반환을 요청하면 비석을 보관중인 야스쿠니 신사에 말해 반환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일불교복지협회 초산 스님과 북한·일본의 불교계 등 민간 차원에서 전개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다. 30년 가까이 진행된 북관대첩비 환수작업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민간 차원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동안 소극적이던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관대첩비 환수작업은 외교통상부, 통일부, 문화재청 등 여러 기관이 손발을 맞춰 추진해야 하는 사안이다. 주무부처는 문화관광부지만 외교부가 나서서 일본과 협상하고 통일부가 북한과 협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현재 일본이 요구하는 ‘남북한 정부 차원의 협의’는 마무리된 상태다. 지난 6월 열린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에서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외교부는 일본 외무성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해놓았다. 일본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무장관도 지난 7월 6일 ASEM회의에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만나 “야스쿠니 신사 측과 대화하면서 성의를 갖고 반환을 중개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돌려받을 경우 문화재청 주관 아래 보존처리해 일정 기간 전시한 뒤 북한과 협의, 원래 있던 위치에 복원할 계획이다. 이렇게 될 경우 남북이 협력해 일본과의 역사적 문제를 푼 첫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광복 60주년, 을사늑약 100주년, 한일협정 40주년, 남북정상회담 5주년이 되는 금년은 ‘한일 우정의 해’이기도 하다. 약탈된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환국하는 것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협력모델이 될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이 민관의 공동노력, 남북 당국간의 협력으로 이뤄지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북관대첩비의 주인공 정문부는 그 공적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된 데는 분단 상황도 한몫했다. 정문부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은 북한 소설가 리유근의 ‘관북의병장’(문예출판사, 1987년)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바다의 충무공이 사극 ‘불멸의 이순신’ 등을 통해 경제 침체와 정국 불안으로 고단한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면 육지의 충의공은 북관대첩비 환수작업을 통해 어려운 대외관계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아직 역사 드라마는 마지막 반전을 남겨놓고 있다. 일본 측은 북관대첩비를 돌려준다는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예기치 않은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게 외교문제다. 실무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이번 광복절에는 이 역사 드라마가 멋진 반전으로 대미를 장식하기를 기대한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뉴스메이커 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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