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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8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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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1910년을 전후해서 약 10년간 개성과 강화도 일원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던 고려고분의 남김 없는 파괴와, 수만 점 혹은 그 이상의 고려자가 부장품 약탈에 이어서 1925년을 전후한 약 5년 동안 대동강 하류의 낙랑고분 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대대적인 도굴은 지난날 한국의 역사유적과 지하의 매장문화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되고 수탈당했던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규모의 조직적인 고분 도굴과 유물 약탈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 하류와 경주지역에 무수히 널려 있는 가야 및 신라고분군도 앞의 두 지역에 맞먹는 무진장한 부장품의 보고였다. 일제 천하의 무법자들이 이 지역이라고 그냥 놔뒀을 리가 없었다. 아니, 초기의 소규모적인 도굴과 유물 약탈은 이쪽에서 먼저 착수되고 있었다. 일본 무법자들의 상륙 루트가 부산→대구→서울→개성→평양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일확천금의 야욕은 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었던 신라와 가야의 유적지에서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고분 도굴 및 모든 종류의 지상문화재 약탈을 뒤에서 조종했던 일본인 골동상이 맨 먼저 거점을 확보한 것도 부산에서였다. 그리고 나서 차차 대구·서울로 제2·제3의 일본인 골동상들이 속속 북상했다. 물론 그들과 함께 해적이나 다름없는 무법자였던 호리꾼들도 북으로 북으로 보물 약탈지역을 확대시켰다.

고령·창녕·선산·함안·진주 일대에 널려 있는 5∼6세기 가야고분의 부장품들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되던 초기의 몇몇 사실기록이 일본인 조사 확인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1911년 3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 잡지에 세키노가 발표한 조사보고 「가야시대의 유적」에 이런 증언기록이 나온다.

"작년(1909년인 듯)에 가야유적을 조사할 때, 창녕에 이르러 고령에서 본 것보다도 더 큰 고분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미 발굴(도굴)되어 석곽 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진주 동북쪽의 옥봉에도 이미 발굴(도굴)된 고분이 있었다. 이 고분에서 도굴된 숱한 도기(가야토기)와 칠기가 진주경찰서에 보관돼 있었다(도굴자로부터 압수했던 듯). 이것들은 공과대학(동경제국대학 공대)에 기증하기로 되어 근일 중에 도착할 것이다."

그자가 그자였다. 일본인 무법자가 도굴했을 유물을 일본인 경찰서에서 불법행위로 압수해 갖고 있다가 학술조사를 나왔다는 세키노를 통해 저들 맘대로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낙동강 하류에 산재하는 수천 기의 고분들이 개성 일원의 고분가 대동강 하류의 고분처럼 일본인 호리꾼과 배후의 조종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께부터였다.

1917년에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참상을 보고하고 있다.

"선산군: 본군에 유존하는 약 1천 기 혹은 그 이상의 고분은, 2∼3년 전부터 이 지방에 고분 속의 유존고물을 완롱하는 폐풍이 일어 사리의 도당들이 매수하는 바람에 무뢰한의 끊임없는 도굴장이 되었다. ……군집하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실로 잔인혹심의 극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이 고분 군집지를 가보라."

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하고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었으면 이마니시의 조사보고를 이처럼 흥분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도 그런 천인공노할 대규모의 고분 도굴의 주범이 일본인이란 말은 차마 못 쓰고 간접적으로만 시사하고 있을 뿐이다.

경북 선산지역에서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을 목격하고 충경을 받았던 이마니시의 조사보고엔 또 이런 증언이 포함돼 있다.

"제6구:2∼3년 전에 고적조사원(총독부 소속)이 발굴·조사했는데, 전문한 바로는 완전한 광(壙:묘혈)이 유존하여 금환 등의 유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상세한 사실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또 기 외에는 모조리 도굴되었는데 그 중엔 아직 생토가 채 마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총독부에서 내려갔던 고적조사원이란 자까지도 순금 팔지 같은 값진 출토품은 슬쩍 제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례가 암시적으로 고발돼 있다.

이 마니시는 계속해서, 선산군 옥성면의 고분지역에서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손쉽게 값진 유물들을 꺼내 가질 수 있게 무덤 속에 드러난 것조차 있는데도 주민들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그런 것에 조금도 손을 대고 있지 않은 사실에 감동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의 고분들 중에는 묘광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도 있다. 고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그렇게 광을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고, 또 침해하지도 않는 순박함이여. 사자(死者)에 대한 예를 결하고 있는 현대의 도굴·파괴, 고인의 분묘에 능욕을 가하고 있는 현대인(일본인)에 비하면 송연한 바가 있다. 구(舊)조선의 도덕을 보려거든 이 옥성면의 제분을 가 보면 족하리라."

이 조사보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고분 도굴범은 조선인 중엔 없으며, 모두가 도의를 상실한 일본인 무뢰한들'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또 서울의 한 골동가게(주인은 물론 일본인이었을듯)에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산지방에서의 도굴품임이 분명한 가야문화의 귀중한 유물들이 일본인들에게 팔려 나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그때 메모했던 유물 목록까지도 그는 조사보고에 밝히고 있는데. ①순금귀고리(경주 보문리의 부부총 부장품과 동일형식) ②순금팔찌(여러 개가 나왔을 듯) ③곤옥 ④관옥 ⑤유리옥 ⑥기타 옥류 ⑦검두 ⑧무기·철창·직도 ⑨마형대구 등이 그것이다. 이중 ②③④는 그후 교토대학으로 들어갔다.

이마니시는 다시, 함안과 창녕에서도 그때 이미 대다수의 가야고분이 도굴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함안군:본군 고분들도 이미 상당수가 도굴당했으나 최근 수년동안은 뜸했던 것 같다."

"창녕군:이 지방의 대부분의 고분도 파괴·도굴되어 그 피해가 너무나 심하다. 목마산 동남쪽 언덕 위에 제1군 8호분은 수년 전에 병사(일본인 병사)가 발굴하여 다수의 와기를 획득했다는 설이 있다. 창녕읍의 북쪽 제5군에서도 대규모의 도굴이 시도되다가 중지한 흔직이 있었다."

이 같은 무법의 고분 도굴사태가 조사·보고되자 총독부는 아직 성한 고분이 많이 있는 창녕 교동 일대에서 약 100기를 서둘러 발굴했다. 이때의 부장품 출토 상황에 대해 다니(谷井濟一)는 마차 20대, 화차 2간 분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17년도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그러니 일본인 무법자들이 선산과 기타 지역에서 수천 기를 도굴한 가야고분의 부장품 유물의 분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능히 상상된다. 그 도굴품들은 그 즉시로 대구·부산·서울, 그리고 본토의 일본인 수집가 수중으로 사라져 갔다. 순금귀고리의 경우만을 말한 다음과 같은 후지다(藤田亮策)의 증언적인 기록은 그 전모의 일각을 알려주는 데 불과하다.

"조선에서 발견된 귀고리(순금)는 실로 상당수로, 학술적 발굴조사를 거친 것만도 70쌍에 이르지만 사인(私人)의 비장품이 되어 조선과 도쿄·교토에 있는 것도 대단히 많다. 도쿄의 네즈(根津嘉一), 교토의 기요마치(淸町謙次)와 모리야(守屋孝藏)가 가진 것만도 수십 쌍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의 신라와 가야지역인 경주·달성·선산·안동·성주·합천·고령·거창 등지에서의 출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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