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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약탈문화재 반환 거부한 맥아더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 거부한 맥아더

반미 우려한 맥아더 “문화재 반환하면 일본인 감정 악화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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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일제의 우리 문화재 약탈에 관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그 실상도 충격적이지만 당시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일제 약탈문화재의 반환을 거부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일제 문화재 약탈의 공범은 바로 미국이었다.

글 한승동 / 《한겨레》 국제부 차장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자 커밍스에 따르면 구미 유수의 한국사 또는 동아시아 연구자들은 아직도 한국사를 중국이나 일본 역사의 아류나 부속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 역사의 의미는 기껏해야 중국 문명을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에 전달하는 비주체적 통로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에는 독자적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동아시아 역사는 중국사와 일본사뿐이라는 얘기다.


[오구라의 별명은 왜 ‘두더지’일까?]


왜 서양의 역사 전문가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할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경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주도면밀한 계획과 막대한 투자가 동원되었다. 예컨대 그들은 그런 투자를 통해 동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문화재 등 방대한 역사자료를 긁어모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재구성한 뒤 역사 문화학계라는 시장에 풀어놓았다. 서양인들의 동아시아 역사탐구 텍스트가 곧 일제 사료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의 국제정세 변동 속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어떻게 유지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새뮤얼 헌팅턴이 고안해낸 ‘문명 충돌론’은 그런 사료 편식의 한 예를 보여준다. 문화 또는 역사의 기초 텍스트가 얼마나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존의 편견과 인식오류를 어떻게 확대재생산해 갈 수 있는지를 헌팅턴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젠 동아시아인들 조차 자신들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이라는 거울 또는 안경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굴절’은 거울과 안경의 기본 속성 중 하나다.

미국의 보수적 시사주간지 《타임》(2월 4일자)이 뜻밖에도 이 일제 거울과 안경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폭력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 제조과정에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얼마나 커다란 기여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획기사를 실어 관심을 끌었다.
《타임》에 따르면 20세기 초중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관학자와 민간수집가들, 수많은 대학 관계자들이 개성·경주·평양 등 조선 전역으로 벌떼같이 몰려들어 땅속 무덤이나 절·전각에 있던 고구려,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의 유물들을 마음대로 파헤치고 부순 뒤 몽땅 가져갔다. 그때 국립박물관 관리로 개성의 약탈현장을 둘러봤던 83살의 한 생존자(동포)는 《타임》에 이렇게 증언했다. “무덤들은 텅 비고 파괴돼 있었다.” “주민들이 내게 와서 ‘그들(일본인들)이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며 조상들 무덤을 파헤쳤다’고 하소연했다.”

1903년에 일본 전기회사의 우두머리로 조선에 온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그런 약탈 과정과 결말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그가 얼마나 무덤들을 파헤치고 다녔던지 그에게는 ‘두더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일본으로 가져 간 각종 청자와 청동불상, 그리고 5∼6세기의 가야 왕릉들의 금관 등 수많은 금세공 장신구들은 지금 도쿄 국립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1100여 점이 남아 있다. 이 약탈품들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수십 점씩 번갈아 가며 전시되는데, 기막히게도 그 다수는 ‘출처불명’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츠 교이치(1907년생)는 조선총독부가 “문서가 아니라 발굴 현장을 통해 조선 문물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관학자들을 대거 동원해 무려 15권 분량에 이르는 〈약탈 목록〉을 작성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단 발굴한 것들은 총독에게 바쳤고 총독은 거기서 천황에게 헌상할 것들을 골라냈다.”

사업가나 연줄을 구하는 자들은 너도나도 조선 유물들을 파헤치고 입수해 상전에게 바쳤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은 재임 4년간 1천 점 이상의 청자들을 모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55점의 서예작품과 432권의 서적, 2천여 점의 청자와 청동거울 등을 긁어모았다. 이른바 ‘데라우치 컬렉션’의 일부는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에 남아 있었는데 일제 패망 뒤 극히 일부가 한국에 반환됐다.


[평양 살던 일인, 고분 출토물 없으면 머저리]

2000년 4월, 북일 수교교섭 제9차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 북측은 일본에 ‘약탈문화재 반환과 보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때 《조선중앙통신》은 일제 문화재 도굴 및 약탈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제는 1904년부터 조선의 고적과 유물 및 보물들의 ‘보존규칙’, 명승지 등에 관한 ‘천연기념물보존령’ 등의 악법을 만들어 문화유물을 합법적으로 강탈해갔다. 유물보존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유물보존회’ 등의 전문 약탈기구들까지 동원했다. 1904년부터 몇 년간에만 개성과 강화도, 해주 등지에서 고려 왕릉을 비롯해 약 2천 기의 고분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자행했다. 단군릉마저도 봉분을 파헤치고 유골관까지 망가뜨리고 도굴해갔다. 고려 태조 왕건릉도 유물이 거의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여러차례 도굴당했다.

1921년 12월 경남 양산의 신라시대 부부무덤을 파헤쳐 금동제관과 목걸이, 귀걸이 등 세계적 문화재 1백여 점을 약탈해갔다. 1924년 10월에는 평양 부근 유물들을 모조리 훑어갔다. 18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왕조실록 등 수만 권의 국보급 장서들을 마구 빼앗아갔다. 1934년에 출판된 《낙랑과 전설의 평양》이라는 책은 ‘당시 평양에 살던 일본인 치고 낙랑고분에서 나온 옛 거울이나 질그릇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머저리 취급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일제는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약탈한 유물들을 관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 바치도록 의무화하고 수집한 수많은 조선유물들을 도쿄 우에노 박물관에 갖다 놓은 뒤 자신들의 국보로 세상에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수많은 조선유물들이 선사품이니 가보니 하는 이름으로 일본인 개인들 수중에 들어갔다.”

지금 일본 천리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그렇게 해서 건너갔다. 문인화의 절품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도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가 1945년 한 선각자의 노력으로 어렵게 돌아왔는데, 그 몇 달 뒤 〈세한도〉를 소장했던 일본인 집이 미군 공습으로 불에 타버렸다는 얘기도 전한다.

2001년 8월 도쿄만 건너편에 있는 지바현 기사라즈에서 북일 수교교섭 제10차 본회담 취재를 갔을 때 들었던 정태화 북쪽 단장의 한맺힌 말도 그런 사정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는 회담 말미에 많은 일본인 기자들 앞에서 일제의 조선 문화재 약탈을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증거”라며 단호한 어조로 “당신들의 박물관과 오사카 교토, 황실 등에 전시하고 있는 찬란한 조선 유물들을 반환하고 피해를 보상하라”고 질타했다. 그런 뒤 그는 “도카이센(신간선 동해선) 철도의 침목 하나하나가 (동원당한 600만) 조선사람들의 시체”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나 교활하게도, 그리고 한심하게도 일본과 한국 언론들은 그런 그의 발언을 일본 정부로부터 수교 조건으로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받아내려는 계산된 쇼 정도로 몰아부쳤다.


[빼앗긴 유물 10만 점, 정부협상 반환물 1600점]

어쨌든 그렇게 일제가 조선에서 빼앗아간 우리 문화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번 《타임》 보도에 의하면 금세공품과 옥장식, 청자 등 도자기, 문인석 등 돌조각, 탑, 사리함, 고문서, 그림, 서예 등 약탈 문화재가 10만 점이 넘었다고 한다.

반면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의 집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실물을 확인한 약탈문화재는 임진왜란 때의 강탈품을 포함해 3만4천여 점, 20여 개국에 나가 있는 약탈품 총수는 7만4천여 점이다. 개인 소장자들은 물론이고 박물관, 미술관, 절 등의 공사기관이나 일본 왕실 등에 소장돼 있는 조선 약탈문화재들이 출처를 분명히 한 채 공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실제 약탈문화재 수는 《타임》쪽 추산치 보다 훨씬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타임》은 19세기 말부터 2차대전 말까지 기간의 약탈물들만 대상으로 삼았다. 4백 년 전 임진왜란과 왜구들의 거대한 노략질까지 포함하면 아마 숫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일제 패망 뒤 이들 중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불과 3500여 점이고 그나마 정부간 협상에 의해 돌아온 것은 1600여 점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드물지만 일본인 소장가들의 기증이나 한국인 수집가들의 구입을 통해 회수된 것들이다.

《타임》은 이 참담한 현실, 이 거대한 범죄행위의 또 하나의 공범자로 미국을 지목한다. 마침내 군사독재정권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권’이 출범한 뒤인 1994년에 처음으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가 집계한 해외반출 약탈문화재는 일본에서 2만9637점이 확인됐고 그 다음으로 많은 나라는 미국의 1만4492점이었다. 그리고 총수는 영국 7189점, 독일 5246점 등을 포함해 17개국 6만4782점이었다. 일본 못지 않게 미국에도 많은 것이다. 그 경위에 어떤 차이가 있든 두 나라는 ‘한반도 점령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을 문화재 약탈의 공범자로 지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다. 다시 《타임》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본의 약탈 조선문화재 반환문제가) 사라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전후 일본의 약탈문화재 반환 논의는 정치적 고려 때문에 급속히 폐기됐다. 반환에 반대한 핵심인물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본 잡지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1948년 5월 맥아더의 라디오 연설 녹취록을 보면 맥아더는 미군에게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 분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회복에 대해서는 소수의견일지라도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반대는 반환요구의 법률적, 윤리적 또는 도덕적 권리를 도외시한 채 미국의 정책적 목표와 점증하던 냉전의 우려 등 당장의 필요성만 고려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문화재 반환이 ‘우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켜 일본을 이데올로기적 압박에 취약하게 만들고 반체제 전복운동에 유리한 토양을 조성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맥아더의 반동적 행태는 2차대전의 최고 전범인 일본 국왕 히로히토와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분명해졌다. 그의 일본 개조 구상은 ‘일본 재건’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미국이 점령정책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약탈문화재 반환 따위에 신경 쓸 까닭이 없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이 정략적으로 야합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쳐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이 약탈 문화재 반환을 사실상 완전히 무시한 또 다른 야합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일본은 형식적인 협정상의 문화재 반환 조항을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웠는지 1326점 반환으로 인사치레를 했다.


[과거의 유물이 현재의 정치를 지배한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과거사를 얘기하고 일본의 미흡한 과거청산과 역사왜곡 등을 지적하면 지적하는 쪽이 오히려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 덜떨어진 자쯤으로 매도당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다. 이 적반하장격의 야릇한 분위기야말로 약탈 문화재 처리과정이 상징하는 왜곡된 역사의 산물이자 역사의 왜곡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2000년에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구석기유적 발굴 날조사건이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도 그런 정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소동에 가담하고 있는 자들은 약탈해간 다량의 조선 문화재가 원래 조선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거나 일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엮어냄으로써 일본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조선을 식민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까지 만들어내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중 상당수가 한일합병 등을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었다고 지금껏 억지를 부리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미반환 문화재들이 약탈한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취득 반출한 것이니 반환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 주장에 매몰돼 있는 세력은 대체로 일치하며 집권 자민당을 비롯한 지배그룹 내에 그런 시각의 소유자가 많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과거의 유물이 현재의 정치를 지배한다’는 명제는 허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입증하고 저들 주장의 허구를 드러낼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자료는 오히려 저들의 손에 거의 다 넘어가 있거나 파괴당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팔아 넘기고 파괴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기에 저들은 “무시당하던 조선 유물들을 발굴 보존하고 평가한 것은 우리 공로다.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과거의 유물이 현재의 정치를 지배한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민족21 2002.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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