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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박물관 뒤편에 버려져 있는 조선 왕릉의 도굴품들

교토박물관 뒤편에 버려져 있는 조선 왕릉의 도굴품들
 
떠난 곳도 모르고 능욕 당하고 있는 그 석상들을 찾아
 
 
▲ 교토국립박물관 입구.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91회

·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전문위원)·E-mail:cdkim@mokwon.ac.kr


며칠 전 교토(京都)를 다녀왔다. 가을이 깊어 가는 교토는 여기 저기가 단풍이었다. 고즈넉한 도시 풍경이 가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고도(古都) 교토의 이름에 걸맞았다.
간 길에 자료를 좀 찾을 것이 있어 교토국립박물관에 들렀다. 오래 전에 가보고 이번이 두 번 째 가는 길이었다. 그 날은 신관만 공개하고 본관은 문을 닫고 있었다.
정문 입구와 본관 건물은 유럽식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한 것으로 일본 근대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통건축물이 즐비한 고도 한복판에 들어선 이 근대건축물은 보존도 잘 되어 있었고 그런대로 주위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교토박물관은 유럽식 건물
우리 관광객들은 일본에 가면 근대건축물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런 건축물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고 말이다.
교토국립박물관은 건축가 가타야마 도우쿠마(片山東熊, 1853-1917)가 1897년 세운 것이다. 이제 100년이 조금 더 되고 있는 것이다. 가타야마는 죠슈(長州) 번사(藩士) 출신으로 공부대학교 조가학과(工部大學校 造家學科)의 제 1회 졸업생이다. 그는 졸업 후 공부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메이지 시대 원로이며 실권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와 인연이 있어 황실건축에 몸을 담게된다.


그때 처음 접한 것이 콘더가 설계한 황족 아리수가와노미야(有栖川宮) 저택 현장이었다. 아리수가와노미야 저택(1884년)은 프랑스 르네상스양식의 건물이었다. 건축물 내외 모두 유럽의 건축 원형에 가깝게 설계된 이 건축물에서 현장 실습을 한 가타야마는 르네상스 양식을 이해한 첫 일본인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아리수가와노미야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유럽 각국의 궁전을 둘러보게 된다. 유럽 건축을 실제 체험한 것이다. 당시 일본 황족들은 유럽 귀족의 저택을 선호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1년간 영국, 프랑스에 머무르며 일본 황실 내 건축물들의 실내장식품 조달을 담당하기도 했다. 1885년 가타야마는 황거어조영국(皇居御造營局)에 들어가게 됐고, 이듬해에는 궁전장식품의 설계제작의 실시감독과 본국에서 제작하는 세간품의 조사를 위해 독일에 파견되었다. 그후 그의 궁전 건축물 설계자로서의 지위는 확고해 졌다. 소위 황실건축가가 된 것이다.


10년 후쯤인 1894년 가타야마는 나라(奈良)공원 내에 제실(帝室) 나라박물관(현, 나라국립박물관 구관)을 세웠다. 나라박물관은 가타야마가 궁내성(宮內省) 내장료(內匠寮) 즉, 궁내성의 한 기관으로 황실 건축업무를 맡은 기관의 기사(技師)로서 설계한 첫 작품이다. 이 건물은 벽돌조 단층 건축으로 르네상스양식으로 정리되어져 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895년 제국교토박물관을 준공시킨다. 두 건물 다 르네상스양식의 붉은 벽돌조 단층 건물이었다. 교토 박물관이 세워진 뒤 이 건물은 “창고나 감옥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서양인은 “반은 그리스식 신전, 반은 르네상스식 극장”같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최초의 건축작품 평론은 시미즈(眞水英夫)의 「제국 교토박물관」(《건축잡지》 134호, 1898.2)이었는데 그는 “대지가 천혜의 땅인데 순수한 서양건축으로 설계한 것은 어쩐지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세워진 뒤 사람들은 교토박물관을 “순수한 르네상스양식에 근거하고 있으나, 비례가 이상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가타야마는 이후 우리나라에도 몇 개의 건축물을 세우는데 그것이 1907년 세워진 서울 종로의 운현궁(雲峴宮)과 사동궁(寺洞宮)이었다. 1908년에는 용산의 조선총독부 관저도 설계한다. 그는 이즈음 고종황제로부터 훈일등(勳一等) 8괘장(卦章)을 받기까지 했다.

버려져 있는 석물들
필자는 박물관을 들러 보다가 본관 뒤쪽 ‘히가시노 데이(東の 庭)’라 쓰여진 안내판에 눈이 갔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단순한 ‘동쪽의 정원’을 말하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일반인들은 거의 가지 않게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어쨌든 나는 화살표를 따라 ‘동의 정’쪽으로 갔다. 언덕 위에 있어 계단이 나있고 고목이 우거진 외진 곳이었다. 오른 쪽으로는 주차장이 있고 뒤쪽으로는 차도가 있어 분위기가 산만했다.


그곳에 다다른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눈에 아주 많이 익은 석물(石物)들이 줄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는 전시 상태가 매우 황당한 꼴을 하고 있다. 이름도 없는 석물이 어떤 것은 나무에 가려 있고 질서도 없이 대충 자리잡고들 있었다. 일본의 여러 박물관에는 조선과 관계 깊은 문화재가 수없이 소장되어 있지만 이렇게 외부에 방치된 채 버려져 있는 우리 문화재는 드물다.


석물은 먼저 석인(石人) 13개가 여기 저기 놓여져 방치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석인은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뒤엉켜 있었다.
문인석은 양손으로 홀(笏)을 잡고 왕명을 기다리는 자세를 하고 있다. 툭 튀어나온 눈을 갖고 있는데 어딘가 슬퍼 보였다.
무인석은 긴칼을 빼 두 손으로 짚고 서있는데 이는 만일의 경우 신속하게 왕을 보호하겠다는 무인들의 마음가짐을 표시하는 것이다. 여기 것은 비례상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눈과 코는 주먹만한게 전혀 무인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해학적이라 오히려 다정스럽다. 문인석이나 무인석 모두 온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필자를 더 슬프게 해 주었다.


거기에 석양(石羊) 2개, 석등롱(石燈籠) 2개, 석당(石幢), 석조 육각 기대(基台) 1개, 석조 방대(方台) 8기 등이 둘러 있었다.
그중 가장 모욕적인 것은 석당을 가지고 정자를 지은 것이었다. 석당은 높이 7자 정도의 돌기둥인데 이 석당 네 개를 가지고 사각형 정자를 지어 놓은 것이다. 석당의 윗부분은 아름다운 돌조각이 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 보를 걸어 정자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훼손이 더구나 박물관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라 아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석물들은 오사카에 살던 ‘야마모토(山本) 아야’ 가(家)가 식민지 시대 조선의 여러 왕릉에서 도굴해 온 것으로 그의 오사카 집 일식 정원에 놓여져 있던 것이다. 그가 1975년 10월까지 소유하고 있다가 폐가 되면서 이 석물들을 일괄 교토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왕릉 만들기
왕은 살아 생전에는 궁궐에서, 죽으면 왕릉에 묻혀 영원히 산다. 따라서 이 두 개의 공간은 나라의 위엄과 관계된 곳이라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다. 모두 법도가 있는 것이다. 궁궐과 마찬가지로 왕릉도 그 법도에 따르는 것이다.
조선의 왕은 태조로부터 순종황제까지 27대이다. 그리고 그 왕릉은 건원릉(健元陵)부터 유릉(裕陵)까지 27기가 있다.


왕릉은 대부분 금천교(錦川橋)와 홍살문과 정자각(丁字閣) 그리고 봉분(封墳) 주위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예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 숙종 때부터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랐다. 홍계희(洪啓禧, 1703-1771)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국조상례보편』을 지었다.


이에 따른 조선 왕릉의 배치도를 보면 통상 제일 앞에 무인 4명이 그 뒤를 문관 2인과 말이 지킨다. 문관 사이에는 석등롱(石燈籠)을 둔다. 그 뒤가 혼유석(魂遊石)이다. 일종의 상석(床石)을 말한다. 혼유석 좌우에 각각 하나씩 두는 것이 석당이다. 석당 뒤에는 좌우로 양을 한 마리씩 배치한다. 그 뒤가 핵심인 봉분이다. 봉분은 분구(墳丘)라고도 한다. 봉분 주위를 12개의 옥원(玉垣)이 둘러친다. 제일 마지막에는 호랑이 석(虎石) 두 마리가 좌우를 지킨다.


고종 때부터는 좀 달랐다. 1897년부터 황제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황제능은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따 만들었다. 고종의 능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것이다.
고종황제 신위를 봉안한 제전은 이전 능에서 보던 것들과는 달리 정자형의 정자각 대신 정면 5간 측면, 1간의 일자형 건물이 있다. 석물들도 좀 다르다. 침전에서 가까운 것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이 서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능들과 는 좀 다르다.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cm나 돼 왕릉의 문인석들 중에는 가장 크고 문무인석 모두 성장을 강조하여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순종의 무덤도 고종과 마찬가지로 황제 능 형식을 따랐다. 비록 나라는 없어졌지만 능은 황제의 능이었다. 나라 잃었는데 능만 황제의 능이면 무엇하겠는가?.

교토 박물관에 있는 것은 한 왕릉과 다른 것들을 포함한 것인데 그 능이 어느 왕릉인지 알 수 없다.
일본에는 수백체의 석상이 존재도 없이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하루 속히 일본 전역에 있는 석상 등을 조사, 이를 환수 조치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돌아오는 발길 교토박물관의 좋은 풍경이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는 못했다.

[근대사현장]



김미라 2002-11-26 (130 호)
kmr@arirang21.com
월간아리랑

▲ 박물관 배치도. 본관 뒷쪽에 ‘동쪽의 정원’이 있다.

▲ 조선 왕조 왕릉 석물 배치의 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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