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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속에 숨은 문화재 약탈과 침략의 역사

일본의 역사 속에 숨은 문화재 약탈과 침략의 역사

일본은 남의 나라의 것을 훔치고 빼앗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데 익숙한 존재인가?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는 그들의 행태로 보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본래 일본 땅이 아니었던 훗카이도나 오키나와를 점령해서 자기 땅으로 만들더니 독도도 같은 논리로 뺏으려고 든다. 총칼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면서도 묘하게 도자기 등의 문화재에 대한 애호심은 깊다.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와 역사는 어떤 것일까?


지난 7월 일제 때 밀반출됐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 고본이 반환됐다. 일본은 훔쳐간 팔만대장경을 환수위원회가 아닌 서울대에 돌려줌으로써 반환이 아닌 기증 형식을 띄려고 애썼다. 훔친 문화재를 돌려주면서도 일본은 얕은 수를 쓴다. 그럼에도 지난해 북관대첩비 반환에 이은 반가운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문화재의 반환으로 일제가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는 얼마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고 있다.


약탈 문화재, 도쿄박물관에 전시 중인 일본


일본은 뻔뻔스럽게도 약탈해간 문화재를 국립박물관인 도쿄박물관인 내 동양관 2층 조선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조선관에는 신라 때의 왕관부터 불상, 도자기까지 우리 문화재가 즐비하다. 이들 문화재가 한반도의 어디에서 왔다는 것도 설명까지 적어 놓고 있다.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를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만 봐야 한다. 재일동포들은 그 외에도 일본 재벌 소유의 약탈 유물이 수도 없이 많다고 제기한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에서도 이들 문화재는 청구권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남북 공조로 돌려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도자기류가 많은데 일본인의 도자기에 대한 애호 때문이다. 최근에도 조선시대의 밥사발이 수십억에 팔리고 있는 지경이다. 칼을 앞세운 일제가 도자기를 사랑 한다는 것은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유난히 도자기를 좋아했다. '임진왜란'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차를 기품 있게 마시는 다도를 장려했다. 아마도 칼을 들고 다니는 무식한 사무라이의 열등감을 그렇게라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앞 다투어 도자기를 탐했고 도자기 문화가 우수했던 한반도를 넘보았다.

  

일본의 무사로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쓰마의 17대 번주 시마주 요시히로다. 그는 1만5000여 병력에 총 1만5000정으로 무장하고󰡐정유재란󰡑에 나서 1597년 8월 남원 전투를 끝낸 후 조선인 심당길과 박평의, 두 도공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 중 심씨를 후원해 일본의 3대 도자기 중 하나인'사쓰마 도기'를 만든다.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와의 가고시마 정상회담 때 만난 심수관 씨가 바로 심당길의 15대 후손이었다. 남원의 도공 심당길의 도자기는 어느새 일본 3대 도자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 문화의 특성은 좋게 말하면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강하다는 것이고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남의 것을 빼앗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특징은 문화의 원류를 제거하고 자기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의 역사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뺏기와 왜곡을 통한 자기화에 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흔적 이름 바꾸기로 지우려해


타문화를 자기화하는 일본 역사의 뿌리는 깊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인 법륭사나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동대사의 비로자나불상, 그리고 최고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갖춘 백제관음상 등은 일본이 내세우는 유물들이다. 하지만 이는 백제인 들의 작품이다. 이 유물들은 일본 나라(奈良) 지역에 있는데 나라라는 지명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이 내 나라와 닮았다고 하여 내 나라 내 나라라고 부르다가 나라라고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서기 660년에 망하자 귀족을 포함한 백제인 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나라를 기필코 되찾자는 각오로 부르게 된 것이 바로 나라라는 것이다. 하여간 일본 최초의 수도 나라는 백제인 들의 한과 혼이 스며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또한 법륭사에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있고 세계 불교 미술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백제관음상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역사를 애써 감추려고 한다. 나라에 있는 우리 조상들의 신사인 신국신사(辛國神社)의 경우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본래의 이름은 한국신사(韓國神社)였지만 메이지 위신 때 한(韓)자와 똑같이'가라から'로 소리 나는 신(辛)자를 써서 신국신사, 즉 가라쿠니 신사로 개명해버렸다. 다년간 일본에서 일본에 전래된 우리 문화를 연구해온 아남그룹의 명예회장 고 김향수씨의 주장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교토 광륭사, 즉 고류지에 있는 일본 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꼭 닮았다. 백제에서 만들었거나 백제인이 만들었다는 얘기들이 많다가 그 재질이 한반도산 적송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일본은 이를 외면한다.

  

일본에는 백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쿄 근처사이 타마현에 가면 고려천역(高麗川驛)이 있다. 여기에는 고려천택시도 있다. 일본에서 쓰는 고려는 거의 예외 없이 고구려를 일컫는 것이다. 고려천역이 있는 사이타마현의 고려향은 원래 고마군(高麗郡)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일본인들이 고려라는 명칭을 없애기 위해 고마군을 이루마군으로 바꾸었다가 이를 다시 히다카시, 쓰루가시마시, 한노우시의 3개시로 분할해버렸다. 고마군이란 이름을 없애버렸지만 히다카시에는 곳곳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려산이나 고려천이 그것이다. 일본이 일본 내에서 우리 문화를 지운 것은 일제 침략 당시 우리의 동네 이름을 바꿔버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러일전쟁 승리와 독도 점거

  

일본이 자기화 한 것은 문화뿐만이 아니다. 지진에 시달리고 점차 가라앉고 있는 일본은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필리핀 북쪽의 암초인 오키노도리시마는 고작 더블베드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조가 되면 바위 2개만 몇 십 센티 물 위에 나올 뿐이다. 하지만 일본은 오키노도리시마를 자기 땅으로 만들기 위해 산호충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수백 개의 빈 콘크리트 구조물을 바위섬 주변에 모아 모래가 자연스럽게 모이게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서 모래가 되는 딱딱한 외피의 미생물까지 키우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 섬을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오키노도리시마와 태평양 쪽이 작은 섬인 미나미도리시마, 중국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조어도, 즉 댜오위다오, 독도, 에토로프 등 북방 4개 섬을 확보할 경우 배타적 경제수역이 무려 405만㎢ 로 자국 영토의 10배가 넘는다.

  

이들 섬에 대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은 주로'임자 없는 땅'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북방의 아이누족의 본향인 훗카이도를'임자 없는 땅'이라며 무단 개척해 점령했다. 자기들의 땅이 아니었던 오키나와를 미군 기지로 조차시켜 놓았다가 훗날 자신들의 영토로 환원시켰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군 기지로 내주었다가 자기 땅으로 만들었듯이 2차 대전 패전 후 독도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내주려고 했다. 역시 오키나와처럼 훗날 돌려받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으로 만든 것은 러일전쟁 직후다. 그 후 5년 뒤 일본은 조선을 완전 병합하기에 이른다.

 

러일전쟁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시절이다. 덩치 큰 러시아를 꺾고 한반도와 만주를 손에 쥔 시절이었으니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일본에선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고 일본 우익 정신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 박물관에서 승전 기념 전시회도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와 같은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미영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지 3년 뒤인 1905년 일본은 뤼순을 기습 공격한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이었던 5월 27일과 28일 양일간의 전투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일본으로 기운다. 이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의 동진을 저지시킨 것이 영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은 러일전쟁의 전비 40% 가량을 지원했다.

  

러일전쟁은 해양세력이 일본을 앞세워 대륙세력을 무력화시킨 사건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중국과 북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전략과 일본의 의도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러일전쟁을 수행하던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일본과 밀약을 맺는데 그것이 가쓰라-태프트 조약이다. 러일전쟁은 러일만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겠다는 침략적 의욕이 담겨 있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미일의 이 동반자 관계가 최근 동맹을 넘어 일체화로 나아가는 형국이다.


이토 히로부미, 도고 시게노리는'정한론의 기지' 출신

 

주목되는 사실은 러일전쟁과 한반도 침략을 이끈 세력이 동일 지역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문화재를 주로 약탈해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들도 같은 맥을 이룬다. 그들은 바로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양대 축이었던 과거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람들이었다. 사쓰마와 조슈는 일본의 서쪽 끝인 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다.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을 기념하는 야스쿠니 신사 박물관의 전시회에도 사쓰마번에서 제작한 대포 1문이 전시돼 있었다. 그 대포는 456㎝에 이르는 청동제 무기인데 사쓰마번이 추진한 대외팽창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러일전쟁을 이끈 전쟁영웅 도고 시게노리와 태평양함 대사령관 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루 역시 사쓰마 출신이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은 카스라(일본에선 가쓰라)가 바로 조슈번 출신인 가쓰라 다로다. 이 사쓰마 출신 인사들은 조슈번과'삿초동맹'을 맺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로 손꼽힌다. 이들이 바로 일본의 근대국가에 초석을 놓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천황제를 다시금 일본의 정신으로 옹립하고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중간에 정한의 시기를 놓고 대립하기는 하지만 본의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쓰마 출신으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필두로 오쿠보 도시미치, 구로다 기요타가 등이 있다. 조슈 출신으로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은 이토 히로부미와 나중에 3대 조선통감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을사늑약에 서명한 데라우치 마시카게가 있다.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 마레스케도 조슈 출신인데 일명󰡐노기 장군󰡑이라 불리며 우익들에게 지금껏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자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조선주차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무력으로 일제의 조선 강점을 뒷받침했다.

  

그 외에도 보수파의 맹주라 볼 수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인물은 일본 육군의 수장으로 이토 히로부미 뒤에서 일본의 대륙 침략을 총괄한 인물이다. 러일전쟁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자 전군 참모촌장으로 침략적 근성을 발휘했다. 그는 1896년 5월 크렘린궁에서 열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여해 한반도를 38도선에서 분할하자는 놀라운 내용을 러시아에 제의한 인물이다.

  

정한론의 본향이자 일본의 서쪽 지방의 바닷가인 야마구치 현은 일본 근대 우익의 양성소나 다를 바 없다. 다나카 기이치 수상, 기시 노부스케 수상 등 역대 일본의 내각을 통틀어 수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야마구치 현 이다. 차기 수상으로 유력한 아베 관방장관은 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니 한반도 침략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에 산재한 미군 기지들은 한반도와 대륙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일본의 서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까지 일본은 1세기 전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내세운 탈아입구론에 매여 아시아를 배척하고 침략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모순 속에 살아야 할까? 그런 점에서 쓰시마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가'한일의 미래는 친선교린의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유병문 기자. 민족21  2006.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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