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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과 동북아의 ‘남아시아화’

21세기 한반도의 운명을 짊어지고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유럽연합처럼 동북아에도 공생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이 꿈이라고 역설했다. “부산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긴다”는 선언은 통일을 갈망하는 재외동포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이런 꿈은 이미 공상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북핵이라는 마지막 시련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동북아는 “유럽연합”의 길을 향하느냐, 핵과 민족주의로 중무장한 국가들이 대치하는 “남아시아화”로 전락하느냐는의 갈림길에 서 있다.

현재의 북핵 위기는 1993~94년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이다. 북한이 단순한 외교교섭용 카드가 아니라 핵무기의 실제 보유로 치달을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으로서는 지난해 7월의 배급제 폐지, 납치 인정과 북-일 교섭, ‘핵고백’을 통한 대미타결 등 일련의 ‘결단’이 오히려 실패로 끝난 이후 위기감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라크의 다음’이라는 공포와 더불어 현재 북한의 생명선인 중국과의 관계가 불안정한 것이 북한을 한층 극한적 행동으로 내몰고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지난달 12일 조지테닛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의회 증언에서 북한의 목표가 궁극적인 핵보유에 있다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현재 위기의 직접적 발단은 물론 북한의 핵 개발 재개에 기인한다. 그러나 위기를 심화시키는 책임의 큰 부분이 조지 부시 정권의 강경 일변도 정책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미 대립이 현재대로 계속되는 한 현실적으로 세 가지 귀결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 모두 한국으로선 악몽의 시나리오가 된다.

그 첫째는 북한의 붕괴다. 유엔 안보리에서 북핵 제재가 공식화될 경우 남북간의 경제협력, 국제사회의 지원도 영향을 되살릴 수 없다. 북한이 ‘생존’을 위해 강행하는 핵 개발이 그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약하는 딜레마가 심화되면서, 서서히 미국 강경파의 주장대로 고립화와 붕괴를 촉진하는 상황이다.

두번째 악몽은 미국의 군사행동에 의한 한반도의 전쟁이다. 이라크 전쟁이 예상 밖으로 단기전의 승리로 끝날 경우 대북 군사행동 가능성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부시 정권의 강경파들은 한국의 반대 등 정치적 장애를 인정하면서도 핵시설공격 등 군사적 수단에 큰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냉정히 판단하면 택하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역사상 많은 전쟁이 ‘승리’에 대한 잘못된 확신에서 시작된 것이 사실이다. 최근 미국내에 부쩍 무력행사 논의가 고개를 들고, 일본 정계와 언론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군사행동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교섭용 협박이라고 보기에는 심상치 않다.

마지막이자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동북아의 핵 확산이다. 미국내 일부 강경파의 자신에도 불구하고 대북 군사행동의 정치적 결단은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대북 교섭의 가능성도 거의 없다. 붕괴도, 군사행동도, 교섭도 아닐 경우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부시 정권의 ‘맞춤형 봉쇄정책’ ‘적대적 무시’라는 모호한 전략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북핵’을 빌미로 동북아의 핵 확산을 묵인 내지는 선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최근 방일한 윌리엄 코언 전 국방장관은 자민당 정치가들에게 북핵을 이유로 일본의 미사일 방어 참가를 촉구했다. 또한 지난달 16일치 〈요미우리〉신문 1면을 장식한 칼럼 ‘남북통일과 핵’에서 앨빈 토플러는 “북핵을 한국이 계승”하고 “일본의 핵 개발 비밀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을 “예견”했다. ‘미래학’의 권위자가 한반도 문제에 어느 정도 조예가 깊은지 필자는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핵 논의가 당당하게 전개되는 점이다. ‘북한의 위협’은 전후 일본의 마지막 보루인 ‘핵 알레르기’까지 급속히 침식하고 있다.

이종원/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  2003.3.5.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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