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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위해 보존돼야 하는 ‘악의 축’

베이징 3자 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고 이른바 ‘대범한 해결방도’를 제안한 데 대해 워싱턴의 대응은 다자간 협의틀을 강조하면서 지연전술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미국의 전술은 북-미 관계 정상화의 토대 위에서 남북한 평화정착 과정의 가속화, 철로 연결과 파이프라인 부설 등을 통해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국가 발전전략 추진을 지체시키고 있다.
최근의 담론들은 대부분 북핵 문제의 진로가 북-미 관계를 규정하는 듯한 전제를 깔고 있다. 필자의 기본적인 시각은 이와 다르다. 미국의 대북정책과 북-미 관계가 북핵 문제의 전개를 더 근원적으로 규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대북정책에서 북한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때, 북한 핵에 대한 미국의 가능한 선택지들이 더 명료하게 다가올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안보 영역에서 두 개의 정책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하나는 동북아 지역의 미국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참을 수 있는 수준에서 북한의 위협을 유지·보존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 집단이나 국가로 이전될 수 있는 대량살상 무기 개발과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공존하기 어려운 이 두 정책의제를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일관되게 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베이징 3자 회담 이후 흔히 지적되고 있는 미국 행정부 내의 대북정책의 혼선도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정책목표의 차별성을 표현하기보다는 부시 행정부가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목표 지향성의 혼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베이징 회동에서 평양은 핵과 미사일 문제의 포괄적인 타결을 제안하면서, 종국적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 과정이 실질적으로 시작되기를 원하고 있다. 한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 역시, 세목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큰 틀에서는,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폐기·포기하고 미국과의 평화조약 체결과 수교를 통하여 양국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런 포괄적 일괄타결 주장은 주변국들의 희망사항일 뿐, 워싱턴의 의사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평양이 핵프로그램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을 허용할 때, 그에 상응하여 경제·외교 분야에서 과감한 대북관계 개선 조처를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을 이따금 내보인 적이 있다. 소위 ‘대범한 접근’이 그것인데, 이는 서울을 의식한 외교적 수사는 될지언정 워싱턴의 본심과는 거리가 멀다. 부시 행정부는 유사한 포괄적 일괄타결을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일련의 대북 정책들(북-미 대화의 새로운 의제로서 재래식 전력 배치문제 제기, 핵프로그램 포기를 먼저 할 것 등)에서 그 증거들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베이징 제안 이후 워싱턴의 대응을 기대하고 있던 평양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2002 전세계 테러유형 보고서’(4월30일 발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 국가로 다시 지정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논증이 될 것이다.

부시에게 평양은 신뢰할 수 없는 정권이며 김정일은 국민을 굶기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나쁜 독재자이지만, 이 ‘악의 축’에서 발원되는 위협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을 정당화해 주고, 기존의 미국 헤게모니를 새로운 조건에서 유지하도록 해주는 유용한 구실이 된다. 그러므로 북한은 대량살상 무기 보유 국가로서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동시에 주변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악의 축’은 제거되기보다는 보존됨으로써 미국의 수익을 더 크게 해준다. 바로 여기에 미국의 대외정책 지도부가 누차 되풀이해서 강조했던 이라크와 북한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곧, 후세인 정권이 제거됨으로써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악의 축’이라면, 김정일 정권은 ‘보존되어야 하는 악의 축’인 것이다.

그러나 보존의 필요성이 있다고 해서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개발·무장이 무기한 허용될 수는 없다. 지구적 대테러 전쟁과 관련하여 워싱턴은 북한 대량살상 무기의 비확산·반확산 역시 일관된 정책목표로 추구해 나가고 있다. 북한이 계속해서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무장·수출하여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워싱턴은 단호히 무력제재를 선택할 것이다. 이 경우 부시 행정부는 한편으로 북핵 문제의 유엔 안보리 상정,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다자회담이라는 이중 다자협상 구도에 기대어 국제사회 및 관련국들과 책임을 분담하고 공유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경제제재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거나 대량살상 무기 추정 시설에 대한 국지적 공습을 감행할 준비를 해나갈 것이다. 워싱턴은 대테러 전쟁의 명분으로 국내적 지지를 동원할 수 있고, 미군이 보유한 정밀 유도무기의 정확성과 파괴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강화되었다. 워싱턴의 결정적인 공세는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동맹국인 한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의 국면에서 한국 정부와 여론이 희망하는 포괄적 일괄타결안은 부시 행정부가 바라보는 미국의 국익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워싱턴의 매파들에겐 최악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발전이 직면한 어려운 정황에서, 현재 노무현 정부로서는 북-미 관계의 난국을 한국에 유리한 전략적 게임으로, 혹은 틀과 방향 전환으로 끌어갈 국내적 기반과 역량이 취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인 발의를 시도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의 하나로 남-북-미 3자 관계의 현안 문제영역을 더 근원적이며 포괄적으로 확산하는 전략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대테러 전쟁과 함께 미국의 안보·군사전략의 변화, 군 전력체계의 개편,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가 진행되면서 노무현 정부에는 한반도의 안보 틀 전환을 위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의 공간은 ‘허공으로 발을 내디디는’ 마음가짐이 없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을 뿐이다.

강봉구/ 한양대 연구교수   2003. 5. 13.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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