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광기’의 교훈
월드컵 축구 열기, 아니 ‘광기(狂氣)’에 대해 말들이 많다.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적잖이 나오고 있다. 욕 먹을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중간 입장이다. 양쪽의 시각이 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명암(明暗)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명(明)을 말하는 의견도 타당하고 암(暗)을 말하는 의견도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 모순일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중요한 문제는 그 ‘광기’ 이후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도 빠져들었던 그 ‘광기’를 지켜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를 ‘광란의 술파티’를 떠올렸다. 평소엔 본의 아닌 위선을 떨지 않을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술파티를 생각해보자. 교수·의사·법조인 등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술집 종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체로 음주 매너가 가장 고약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전문직 종사자들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평소 근엄한 연기를 많이 해야 하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속으로 쌓인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술은 그 쌓인 스트레스의 빗장을 풀어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거니와 쌓인 게 한꺼번에 배출되는 만큼 그 양상이 매우 격렬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고강도의 스트레스 사회다. 스트레스 없는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만서도 한국엔 스트레스 강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배출구도 많지 않다는 점에서 유별난 면이 있다. 한국의 음주 및 유흥 산업이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발전(?)한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과거 주로 30대 이상 남성 위주로 발전해 온 한국의 스트레스 해소 산업이 각종 방(房) 사업에서부터 ‘관광버스’에 이르기까지 성별과 연령을 초월하여 전방위적으로 확산돼 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스트레스 해소 산업이 한국인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줄 수는 없는 일이다. 스트레스라는 게 꼭 개인적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치를 비롯하여 한국 사회의 중요한 영역과 제도와 조직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 받게 되는 사회적 스트레스도 있거니와 다른 나라들이 한국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걸 보고 받게 되는 국가적·민족적 스트레스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간 한국에서 국제 스포츠는 그런 스트레스 해소 산업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 왔다. 과거 그런 기능은 독재정권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월드컵 광기는 자발적인 동시에 대중매체와 대기업의 상업주의에 의해 부추겨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양상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그런데 나는 ‘자발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다소의 의문이 있다. 나중에 무슨 이익이 남건 우선 우리가 월드컵을 위해 쏟아부은 그 엄청난 돈과 노력을 생각해보자. 어떤 일에서건 그런 정도의 돈을 투자해 여건을 조성해준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수요’를 순수한 의미의 ‘자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허무한 가정이긴 하지만, 정치를 모든 국민에게 개방하는 시도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정당의 지구당엔 늘 시민들이 들끓고 모든 후보는 이미 선거 이전에 그야말로 순수한 민의에 의해서만 선택된다. 모든 행정관서에서도 시민을 그야말로 주인으로 대접해준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월드컵을 위해 쏟아부은 돈과 노력의 반만 투자해보자.
나는 그렇게 하면 월드컵 광기의 수준엔 미치지 못할망정 정치가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국민의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 산업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민주당에서 그 후속 조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노무현 바람’이 잠잠해진 것이지, 그 바람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다. 국민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라. 그게 바로 이번 월드컵 광기가 우리에게 준 최대의 교훈이 아닐까.
〈강준만·전북대교수〉2002.6.25.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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