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제 몰락의 교훈
뜻밖의 기회가 생겨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0여일 간 다녀오게 됐다. NHK방송의 프로그램 제작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의 제작의도는 남미의 파리 또는 라 플라타(남미대륙을 가로질러 흐르는 대하)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며, 약간 유럽의 향기도 머금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해 글로벌경제의 파도타기에서 순식간에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현상을 살피는 것이다.
나는 프로그램의 안내역할과 해설자를 겸해 300만명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대도시의 각지를 둘러보며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격동하는 도시의 고동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아르헨티나는 몇 년 전까지 글로벌경제의 ‘승자’ 대열에 끼여 신흥시장의 모델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계기가 된 것이 80년대 말에 시작된 ‘달러 연동’에 의한 페소화의 안정화 정책과 공공기업의 대담한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다.
그 때까지 고양이의 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성적 인플레에 시달려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를 잃고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페소화와 달러화를 1대1로 교환하는 대담한 통화정책을 통해 미국 경제와의 관계를 심화시켜 단숨에 글로벌경제의 파도타기에 도전했던 것이다.
확실히 90년대 후반까지는 안정과 번영이 계속됐다. 강한 페소화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자신감을 상징했고, 그 왕성한 구매력을 지렛대로 국민경제는 인플레의 위협에서 해방돼 성장의 궤도를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달러화와의 1대1 교환비율은 실제로는 허구의 경제력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페소화는 폭락해 3분의1 이하로 가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신용불안이 확산돼 달러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페소화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정부는 달러구입의 정지를 선언하고, 예금봉쇄를 단행하는 한편 금융기관의 거래를 일시 정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국민생활이 패닉상태에 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금융불안을 신호탄으로 도산·폐업이 잇따르고, 실업률은 20%대로 뛰었다. 소득은 눈에 띄게 축소되고 가계사정은 바닥이 드러나는 상태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이제 아르헨티나 경제의 왕성했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국민 1인당 소득수준은 중남미에서 최하위로 전락했고, 빈곤한 지역에서는 굶주려 사망하는 어린이가 속출할 정도로 기막힌 경제적 비극이 주민생활을 엄습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경제의 비참함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극적인 모양으로 표출돼있다. 뉴욕이나 파리의 화려한 고급주택가와 길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중심가 코앞에 재난민의 무리와 같은 빈곤층이 사는 슬럼이 이어져 풍족함과 절대적 빈곤이 동거, 혼재하는 도시공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슬럼의 주민은 도시의 중심 가까이와 주변부를 포함해 인구의 10%에 달하고 지금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매일 밤 쓰레기로 주운 음식 찌꺼기를 게걸스럽게 먹고있는 모습은 비통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조명을 바라보면서 글로벌경제가 과연 세계 각 지역에 무엇을 가져다주고 있는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이는 것은 풍요와 빈곤이 도시공간 안에서 혼재하고, 그 격차가 절대적인 단절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글로벌 세계의 현실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세계제일의 구역이 곳곳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제3세계적 비참함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이 넘는 장기불황에 고민하고 있다고는 해도 경제대국 일본이 일거에 아르헨티나와 같은 상황으로 전락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르헨티나가,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과격한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파산의 모습은 일본에도 여전히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띠고, 사람들이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 2002.12.10. 문화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