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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그림의 이해와 감상

우리 옛 그림의 이해와 감상

-7월1일 민족문화강좌 -

우리 옛 그림의 감상 요령에는 두 가지 큰 원칙이 있다. 그것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 옛그림 읽기

옛사람들은 그림 감상을 일러 '간화(看畵)', 즉 '그림을 본다'는 말보다 '독화(讀畵)', 곧 '그림을 읽는다'는 말 쓰기를 더 좋아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 본 제자 이상적이 스승께 올리는 편지에서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음'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幀 伏而讀之 不覺涕淚交 )" 하고 쓴 것도 그 일례다.

그림을 '읽는' 것과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본다'는 것은 겉에 드러난 조형미를 감상한다는 뜻이 강한 데 비하여, '읽는다'는 말은 동양의 오랜 서화일률(書畵一律)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글씨와 그림이 한가락이므로 보는 방법도 한가지로 '읽는 것'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식 가로쓰기 방식으로 글을 쓰고 읽는다. 이 때 시선(視線)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그림 보는 사람의 잠재적 시선은 먼저 좌상(左上)으로 갔다가 대각선을 따라 우하(右下)로 흘러내린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시선이 닿는 곳은 왼편 상단이다. 그 다음은 알파벳 X 자를 쓰듯이 왼쪽 획의 흐름을 따라서 보고 이어서 오른 획의 방향을 따라 보는 것이다.

옛그림은 이와 달리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눈길을 옮겨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즉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이어지는 대각선의 흐름을 따라 보는 것이다. 조상들은 한문이건 한글이건 그렇게 쓰고 읽었으며, 옛 악보(樂譜)인 정간보(井間譜) 역시 이 같은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옛그림에서 중요한 자리는 오른쪽 상단이고, 왼쪽 하단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우상(右上)에 제목을 적고 좌하(左下)에 작가의 관지(款識)를 넣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옛그림을 서양 사람 습관에 따라 X자 모양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그림은 모름지기 한자 '풀 벨 예(乂)' 자의 획순처럼, 먼저 삐침(약掠)을 따라서 보고, 이어 파임(책 )을 좇아가듯이 감상해야 한다.  {상서(尙書)} [홍범(洪範)] 편에는 '종작예(從作乂)', 즉 '이치를 따르니 조리가 있다'는 글귀가 있다. 이 말이 바로 우리 옛그림을 보는 '옳은' 방법을 시사한다고 생각하면 편리할 것이다.

애초 옛그림의 표구 형식부터가 족자(簇子)나 병풍차(屛風次)처럼 내리닫이가 많은 이유는 모두 글 쓰는 방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이상 붓글씨 하는 분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글쓴이가 굳이 길게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9m에 이르는 이인문(李寅文)의 걸작 두루말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전체를 다 펴 보인 적이 있었다. 이 때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데 한결같이 왼쪽 끝을 향하는 것이었다. 작품을 꽁무니부터 거슬러가며 보는 격이라 한편으로 어이가 없으면서 한편으로는 딱했다. 그러나 잘못은 어린 학생 쪽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글쓴이가 작품 위에 써서 걸어 놓았던 해설판이 가로쓰기였기 때문이다.

동서양에 따른 감상 요령의 차이는 다방면으로 확대돼서 아주 큰 문제가 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걸려 있는 현판은 조선왕조 숙종(肅宗) 임금이 쓴 글씨다. 그런데 원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것을 요즘 사람들 읽기 좋으라고 좌에서 우로 순서를 바꾸었다. 때문에 글자 획간(劃間)의 균형이 무너져 버려 어색하기 짝이 없다. 또 우리나라 고서화(古書畵) 전시도록을 보면 대부분 표지가 왼편인 서양식 좌철책(左綴冊)이다. 모두 꽁무니부터 작품을 보게끔 한 것이다.

옛그림 전시장엘 가 보아도 사정은 같다. 많은 경우 입구에서 왼편으로 돌게끔 동선(動線)을 설정해서 작품을 거슬러 보게 한다. 글쓴이처럼 굳이 오른편부터 보겠다고 고집을 피다가는 동선을 따르는 많은 서양식 관람자들과 머리를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전시된 작품의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모처럼 TV에서 옛그림을 방영하고 해설하는 걸 보면 카메라 앵글은 그림의 세부를 영락없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훑어 간다. 이 경우 작품 감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작품을 '읽는' 동서양의 방식 차이는 아주 작은 듯하나,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처럼 예상 밖으로 엄청나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옛그림은 애초 가로쓰기 식으로 보면 그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옛 화가들에게 세로로 읽고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보는 이도 당연히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 쪽으로 감상해 나갈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도(構圖)를 잡고 세부(細部)를 조정하고 또 필획(筆劃)의 강약까지도 조절했기 때문이다.

 - 옛그림 감상법

감상 요령의 첫째는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접근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하여 경계심을 풀고 친근감을 느끼며 결국은 좋아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리워하게 마련인 고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친근하게 느끼니까 그 내용까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오랜 진리이다.

글쓴이가 대학에서 옛그림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을 때 보면, 학생들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작품은 김홍도의 풍속화였다. 그들에게 초등학교 때 이래로 가장 친숙한 옛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바로 옛그림을 잘 감상하기 위한 첫번째 비결은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안목은 설령 지적인 것이 아닌 막연한 것일지 몰라도 오히려 허황된 권위로 포장된 기성 학계의 틀에 박힌 설명보다 훌륭한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자기만의 눈으로 소화하고 즐길 수 있는 자율적인 역량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둘째,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본다. 세상을 살다보면 '보았지만 못 보았고 들었지만 못 들었다'는 정황이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이 감탄해 마지않는 작품도 건성으로 그저 휙 지나쳐 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게 마련이다.

셋째, 오래 두고 보면서 작품의 됨됨이를 생각한다. 오래 보아서 좋은 작품이 정말 좋은 작품이다. 훌륭한 그림은 진정 훌륭한 인간과 같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가치가 깎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진가를 발한다.

그림은 한눈에 전체가 다 보인다. 그림의 좋고 나쁨은 한순간에 파악된다. 그런 점에서 그림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늘 부분 부분 쫓아가며 감상할 수밖에 없는 음악과 다르다.

사실 복잡미묘한 예술 세계의 깊이는 말로 설명될 수 없다. 그림이건 음악이건 건축이건 또는 무용의 한 장면이건 그것은 그것 자체일 뿐 언어나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그림은 정지된 공간 속에서 앞서 말한 수많은 갈래의 여러 측면으로 각각 관찰되고 음미된다. 뿐만 아니라 주제는 구도를 결정하고, 구도는 필치를 결정하고, 필치는 운율감을 결정하는 것처럼 각각의 측면은 또 다른 측면과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조차 전체를 반영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한 세포 속에 전체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정보가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비겨볼 만한 점이 있다. 여기에 그림이 갖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은 사실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마다 자기 삶의 내용에 비추어서, 자신의 교양과 안목과 기분에 맞추어서 볼 수 있는 것이 그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히 보았던 작품 속에서 긴 세월이 흐른 뒤에 감상자 자신이 깜짝 놀라는 전혀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일도 적지 않다. 보는 이의 삶과 교양, 안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단기적으로도 볼 때마다 달라진 감상자의 기분이 작품 보는 눈을 새로운 각도로 조정하기도 한다.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의 경우라면 신선한 맛을 즐기면 그만이다. 반면 어떤 작품들은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그 변함 없음이 좋다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작품 속의 어떤 면모가 이러한 만족감을 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어 알기보다 감상자 스스로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만의 즐거운 몫이다. '오래 보면서 작품의 됨됨이를 이모저모 생각하는 것'은 바로 즐거움 자체다.

우리는 옛그림 속에서 지나간 역사를 볼 수 있다. 옛그림 속에는 다치지 않은 옛 그대로의 자연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옛사람들의 눈길이 스며 있고, 옛사람들의 어진 마음자리가 담겨 있으니, 한마디로 말해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떠한 물건도 저절로 수백 년이나 보관되는 일은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종국에는 작품을 그린 화가라는 한 인격체의 독특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

     오주석(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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