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헌법 수호 사민당 극소수 전락
좌파폭력, 평화운동에 먹칠
일본의 전후사회를 지배했던 키워드는 ‘평화주의’다. 전전의 ‘군국주의’를 생각하면 평화주의로의 변신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의심스럽기조차 했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동안의 흐름은 이것과 정반대다. 군사주의와 전쟁 위험성에 노출돼 있던 주변지역이 평화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반목과 증오의 과거시대와 결별을 준비하는 지금, 일본은 오히려 전후 50년을 지배해왔던 평화주의라는 가치를 버리고 다시 군사주의의 깃발을 흔들며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등장 이후의 변신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같은데 이는 사회적 제어장치가 거의 붕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본내 평화주의를 지탱해왔던 정치·사회세력, 특히 대표적 호헌·평화주의 정당인 옛 사회당(현재 사민당)의 몰락과 사회당의 ‘우선회’를 제어해왔던 반전평화세력의 쇠퇴가 결정적 원인이다.
사회당은 개헌 저지선인 1/3 의석을 유지함으로써, 자민당 등 일부세력이 개헌을 통해 일방적으로 ‘우경화’로 치닫는 것을 견제했다. 일본의 전후 평화주의가 ‘1/3 평화주의’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당은 정권획득을 통해 절대적 평화체제(작가인 오다 마코토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를 일본사회에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개헌저지선을 유지함으로써 전후 평화주의의 ‘방파제’ 구실을 해왔던 셈이다. 그런데 현재 사민당의 중의원 의석수는 18석에 불과하다. 전성기였던 1958년의 166석이나 90년 139석과 비교하면 거의 ‘괴멸’에 가깝다.
제1야당인 민주당이 유사법제 제정과 헌법개정 논의에 찬성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유일한 호헌 평화세력의 괴멸이 평화주의의 쇠퇴 그 자체인 셈이다. 사회당의 몰락 원인을 둘러싸고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옛 사회당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미-일안보조약의 폐기, 자위대 위헌과 같은 비현실적 이상론에 빠져 유럽 사민당과 같은 보통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 최대 원인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유럽의 사민당이 나토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인 것처럼 일본의 사회당도 미-일안보조약을 현실로 받아들여 정권을 획득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평화주의는 미-일안보조약(미-일동맹체제)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일본의 ‘비(경)무장’이라는 안보 공백을 미군이 대신 메워주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당이 주장한 미-일안보조약의 폐기는 오히려 전후 평화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다. 문제는 전후 평화주의를 보완할, 혹은 대신할 새로운 안전보상 구상 제시에 사회당이 실패했다는 것이다(굳이 있었다고 한다면 ‘국제연합 중시의 안전보장 구상’이었을까).
사회당의 외연에서 평화주의를 지탱해왔던 반전 평화운동 세력의 몰락도 평화주의 퇴조에 한몫 거들었다. 특히 좌파의 분열대립으로 인한 살륙은 좌파운동권이 주도해왔던 반전평화운동의 도덕성과 대중성에 간접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끼쳤다. ‘우치게바’(내부라는 뜻의 일본어와 Gewalt라는 독일어의 합성어로 조직내의 주도권 대립을 뜻함)로 인한 서로간의 폭력으로 희생된 피해자만 1969-1999년 동안 무려 1960건, 사망자 113명, 부상자 4600명에 달한다. 청년·학생시대의 ‘공통경험’이 사회 곳곳에서 축적돼 새로운 개혁의 힘으로 작용하는 나라가 많은데 반해 일본의 청년·학생들이 경험한 60~70년대의 ‘상처’는 단절과 분열의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각론에 강하고 총론에 약하다’ ‘지나치게 탈정치화돼 권력구상이 없다’ ‘지나치게 파편적이다’는 일본 시민운동의 특징은 이런 상처에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시민세력과의 ‘연대’가 여전히 현실적으로 왜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일본의 군사주의 경향 강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응방식을 상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주변지역도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억지·관리해줄 수 있는 힘을 동북아시아 바깥, 다시 말해 미국에서 찾는 방식이다. 첫 번째 방식은 동북아시아에 과다한 군비경쟁과 군사주의 경향의 강화를 초래할 것이고, 두 번째 방식은 일본의 군사주의 경향의 강화가 미국의 적극적 요청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평화시민운동 세력과의 연대 또는 지원을 통해 일본의 군사주의 경향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중요하다. 군사주의 경향의 완결판이라 할 헌법 9조 폐기(헌법개정)를 곧바로 추진하지 못하고 ‘헌법해석’이나 법률제정 등을 통해 에둘러 군사주의의 강화를 꾀하는 것은 그나마 일본 시민사회와 주변지역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경제사·한일관계)
일 반전단체 ‘찬스 포노포노’ 리더 가나 도모코
“시민운동 흐망, 이라크전 시위때 느껴”
일본에서 젊은이 중심의 새로운 반전·평화운동단체 ‘찬스 포노포노(Chance! Pono2. ‘좋은 방향으로 돌릴 기회’라는 의미)’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가나 도모코(32)는 “지금 순간에는 우익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해 보이지만, 시민운동 세력의 재활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과제는 좌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60%의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시민운동이 급격하게 약화된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는 1980년대 들어 일본이 부자나라가 되면서 개인이나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골치아픈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둘째는 반전·평화운동 세력의 책임도 있다. 일부 극좌세력들이 내부항쟁, 테러를 저지르면서 일반사람들이 반전운동을 무서워하게 됐고 운동세력도 내향적으로만 집중해 대중과의 격리가 점점 심해졌다.
보통사람 함께할 방법 고민
-시민운동이 강력한 우익세력의 힘을 견제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워낙 능수능란하다. 예를 들어, 반전단체가 젊은이들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사이에 상대편은 젊은이들에 인기가 있는 만화 등의 매체를 가지고 접근했다. 시민운동 쪽도 자기만의 방법이 아닌 보통사람의 방법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各만?상황은 점점 나빠질 뿐이다.
-우익세력은 ‘보통국가’라는 큰 그림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시민운동은 어떤 논리로 대항하고 있나.
=보통국가는 선전일 뿐, 실제는 미군의 활동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 1천만명을 죽인 반성에서 평화를 위해 공헌하자고 만든 것이 평화헌법이다. 일본은 평화를 위해 실천할 책임이 있다. 시부야나 카페에 오는 젊은이들에게 우리들의 주장을 설명하면 대부분 찬동한다.
20~30대 중심 새흐름 창조
-지금 시민운동 진영에는 지도력이나 거점이 보이지 않는다.
=50대가 펼쳤던 운동의 반동으로 40대가 완전히 이탈했다. 이들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희망은 20~30대가 중심이 돼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3월4일 열린 이라크 침공 반대시위에 베트남전 반대운동 이래 가장 큰 규모인 5만명의 시민, 그것도 보통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 ‘조그만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도쿄/오태규 특파원 ohtak@hani.co.kr 2004.8.16. 한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