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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0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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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상품 전면 개방의 문제점

일본 대중문화상품 전면 개방의 문제점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후보시절부터 일본대중문화 개방에 대하여 강한 소신을 피력해 왔으며 다수 국민의 반대를 무시하고 일본왕을 알현하고 온 이후 영화를 비롯한 일본대중문화를 전면 개방해 버렸다. 물론 한국에는 김대통령 일본방문 이전부터 일본문화가 넘쳐나기는 했지만 일부러 보려고 들지않는한 일본문화를 보지 않고도 살아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일본문화가 보기싫어도 접하지 않을수가 없게 되었다. 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이 지나치게 독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는 것이 옳은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를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보기로 한다.

현대세계에 있어서 문화교류의 의미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세계체제의 운용방식은 개편되었다. 구식민지들이 해방되어 주권을 지닌 민족국가로 독립하게 되자, 제국주의 시기에 전면화되었던 직접적, 군사적 침략보다는 문화를 통한 간접적 방식의 지배가 이 시기의 한 특징이 되었다. 개개 민족국가간의 '우호·친선 증대를 위한 문화교류' 및 세계의 다양한 문물과 생활양식 정보등의 '자유로운 유통 선택 및 수용'이라는 관념은 이 세계에서 당연스레 통용되는 지배적인 전제사항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세계체제 중심부의 문화가 여타 나라에 엄청난 규모로 전파되었다. 외관상으로는 대개 호혜·평등한 교류의 형식을 띠었으나 그 내실은 압도적으로 '일방적인 유입'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와 코카콜라, 맥도널드 햄버거, 팝송과 불루진으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확산은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중심부 문화의 보급은 단지 '외래적' 문물 풍습 가치 관념 정서 정보 등의 소개로만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러계기를 통해 민족적 고유성을 위축 소멸시키고 수용자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중심부 문화의 방향으로 변모시켜 아류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 이 효과는 문화면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이를 기반으로 문화상품에서 중공업제품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상품의 판매를 촉진시키는 경제적 효과를 낳을 뿐 아니라, 한 사회 성원들을 중심부의 질서와 의도 및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게 하는 정치적, 군사적 효과를 거둔다.-(이지원, 일본의 팽창적 문화정책과 한국 내 일본문화 유입의 문제점 1994 김영사)
이러한 문화의 역할은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소멸되고 WTO체제로 정착한 세계화로 상정되는 지금상황에서는 훨씬 강화되어 보다 전투적인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상품으로서의 성격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근대이후의 한일관계
한국과 일본사이는 오랜 옛날부터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현대 150여년간의 양국관계는 비극적인 관계의 연속이었으며 양국관계가 이렇게 된 주 원인은 일본의 팽창야욕에 있다. 1800년대 후반은 한국이 낡은 봉건왕조의 틀을 벗고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 전사회가 모대기며 진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이 기간 몇십년만 외침을 받지 않는다면 내부적으로 진통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앞으로 좋은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성숙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으로 시작하여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침략과 침탈을 자행하여 한국역사의 자발적 발전 가능성을 철저히 말살하였으며 결국은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일찌기 고대시절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을 자신들의 영토로 알았으며 일본이 중심이되어 중국과 사해를 평정해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이 전세계의 중심인 셈이다. 일본의 이런 왜곡된 역사관은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일본지도층 의식에 심어졌고 일본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나타나 위력을 발휘하곤 하였다. 근대들어 일본이 서방의 침략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미국의 페리함대에 무릎을 꿇으면서 나타난 정한론 또한 전형적인 일본역사의식의 발현이었다. 1896년 운양호라는 군함을 앞세우고 겁많은 조선왕조를 굴복시켜 체결한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이후 한국을 전면적으로 유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항구 3개를 개항하고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일본화폐의 국내유퉁을 허용하고 면세권을 인정하게 하는등 한국을 완전한 일본의 활동무대로 만들었다. 이후 일본은 무능한 조선왕조를 위협하면서 왕비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의 제반제도를 일본침략에 편리하게 고치고 광산과 경제이권을 철저히 챙겨 일본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밑천으로 삼았다. 갑오농민전쟁 토벌에 나서 자주적 역사발전의 기본주체세력을 철저히 말살하였으며 의병전쟁 토벌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저항세력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처럼 한국의 역사발전 동력을 거세 소멸한 후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식민지배를 통하여 일본은 한국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그 첫 번째가 민족앞잡이 즉 친일파의 제도적 양산이다. 이를 통하여 민족운동을 봉쇄하고 민족세력을 분열시키며 오도된 길로 민족을 인도하였다. 다음으로는 무시무시한 철권무단통치이다. 한국인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채 죽음같은 세월을 보내면서 오직 일본인의 노예로서만 지내게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인적, 물적자원의 무한대적 수탈이다. 이런 수탈을 통하여 일본은 국부를 살찌우면서 강국으로 발전해 나갔지만 한국인은 짐승보다 험하게 일하고도 가난과 병고에 신음하다가 죽어갔다. 다음으로 일본이 한국인에게 남긴 상흔은 민족문화의 말살과 식민지 노예의식의 주입이다. 심지어는 성을 갈고 말까지 못쓰게 만들어 한국인 그자체의 말살을 기도하여 민족이 거의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의 지나친 야욕이 서방 강대국과 마찰을 일으켜 전쟁에 패망하므로써 우리민족이 철쇄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식민지배의 엄청난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근대시기에 있어서 한일관계란 무법적 침략자와 식민지 노예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해방이후의 한일관계

일제의 철쇄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러나 제힘으로 찾은 해방이 아니다보니 식민지의 온갖 병폐는 그대로 남아있고 그위에 새로 진주한 외국의 무거운 짐이 다시 우리민족 위에 들씌워졌다. 식민지배의 직접적 영향으로 설치된 3·8선이 민족과 강토를 가르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간 뒷자리는 일제때에 양산되어 민족말살에 날뛰던 친일파가 다시메워 식민지시대보다 더 험악한 폭압체제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패망이후 일본은 잠시 물러갔지만 우리 동족상잔과 세계 냉전체제에 편승하여 지난날의 영화를 되찾아 세계2위의 경제대국, 군사대국, 문화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미 전쟁 전의 위세를 넘어서 세계를 움직이는 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분단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시절처럼 서로 협조하면서 동북아의 긴장을 높이고 냉전의 파고를 높이는데 발을 맞추어 나갔다. 한국과 일본은 6·25때부터 실질적인 협조가 이루어졌지만 일본군 헌병장교인 박정희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쥐면서 공식적으로 국교를 맺고 한국이 다시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아래로 편입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지난날 일본의 극우침략전쟁의 주역들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 와서 박정희를 지원하기에 바빳다. 일제가 저지른 온갖 악행은 없었던 일로 되고 말았다. 일본은 한국의 친일군사정권을 음양으로 지원하고 군사정권은 정책적으로 일본에 특혜를 주면서 일본의 영향력 아래로 한국을 깊숙하게 밀어넣는 작업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은 엄혹한 탄압을 받고 소멸되었으며 민족통일과 사회개혁은 거론초차 할 수 없었다. 한·일간의 호전 식민세력이 형성한 검은유착관계 때문에 한국에서는 초보적인 민주주의조차 이루기 어려웠으며 일본에서도 민주적인 지향이 점차 후퇴를 강요당하고 파시즘세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은 일본관서 경제권의 하청공장으로 편입되고 말았으며 해마다 대일 순무역적자만 년 165억불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국가적 성격

한국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았으며 친일세력이 국가전체를 장악 지배하는 반민족적인 특성을 안고 출발했다. 일본군 무장해제선이던 분단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지고 민족간 분단이 고착화된 것은 외세의 작용보다 오히려 민족말살에 앞정섰던 친일세력의 작용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친일세력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가 출현하면 자신들이 심판, 청소될 것을 알고 누리던 권세와 부를 지키고 세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민족 대결구도 창출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한국은 해방과 동시에 미군의 군정아래 있었고 이어서 민족 대결을 주업으로 하는 반민족정권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배의 해독을 청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해방후 한국사회에는 일제식민지기 민족을 말살하기위해 제정되었던 온갖 악법이 그대로 살아서 집행되고 있었고 민족말살에 날뛰던 친일모리배들이 일본인들이 앉아있던 권력기관을 틀어쥐고 앉아 민족정신을 탄압말살해 나갔다. 사회 전분야--관료, 경찰, 군, 교육, 문화, 예술, 종교, 경제, 학문, 언론, 검찰, 법원--한국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는 전부 친일파들의 손아귀에 쥐어있어 어느면에서는 식민지시기보다 더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한국사회는 법, 제도, 관습과 집행인력 모두가 식민지 시기를 그대로 이전해 놓은채 흘러가고 있었다. 바뀐 것은 국가이름이 대일본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 천황제 파시즘이 민주주의로 이름만 바뀐채 내용은 식민지파시즘 그대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식민지기에 주입받은 민족허무주의와 식민지 노예의식이 한국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민족말살의 기제를 청산할 어떤 수단도 찾을수가 없었다. 사회전체가 워낙 강력한 통제장치에 쌓여 있어서 출구를 찾기 어려웠고 가끔 터져나오는 사회적 분노도 일규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반민족적 이념, 구조, 인맥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고 한국사회를 둘러싼 일본,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지배구조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민족문화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인하지 못한채 반세기를 끌려서 흘러오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와 민족간의 모순, 즉 식민지배체계의 내용과 틀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가 권력체계가 민족적 지향을 억압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해온 바로 그점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식민문화, 식민의식에 찌들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채 턱없는 과장으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자기비하로 내달려왔다. 식민성 극복없는 한국문화 건설은 구름위에 집짓기이다.

일본의 국가적 성격

일본은 연합군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패전후 국가가 분할되고 침략전쟁의 주도세력은 추방, 처단당하며 상당한 민주적 국가로 재탄생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미국의 냉전기지화 정책에 따라 전면 백지로 되고 침략전쟁의 주범들이 일본정치, 사회의 주역으로 재등장하는 기괴한 현실이 연출되었다. 특히 침략전쟁의 주역이던 일본왕이 그대로 살아남아 전쟁전과 다름없는 일본사회의 절대적 구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전쟁전에 비해서 실질적인 권한은 많이 없어졋지만 천황으로 상징되어온 국가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침략전쟁의 주역이던 전범들이 전후 일본의 정치적 주역이며 경제적 주역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A급전범이던 고다마 요시오 같은 자들이 바로 자민당 창당 주역이며 전후 실세였다. 또 한국 박정희대통령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라고 하여 물의를 일르켰던 기시같은 사람이 자민당의 총리이자 수상이자 파벌보스가 되었다. 80년대에 전두환대통령을 지도하여 아시아에 냉전의 긴장을 높이며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한국에 일본 대중문화를 넘쳐나게 만든 주역인 나까소네같은 사람도 해군 장교 출신으로 패전의 억울함에 눈물흘리던 인물이었다. 요 최근에 일본사회에서 청산되어 세간의 박수를 받았던 후생성의 부패인맥인 의사들의 조직은 다름아닌 731부대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에 정보를 넘겨주고 살아남아 일본의료의 축으로 움직였으며 625때는 한국전쟁에도 관여하고 심지어는 미국·이라크전쟁에까지 활약했으니 그 긴 여정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세력과 철학이 움직이는 일본사회는 자연히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전의 국가를 재건하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 움직임으로는 우선 미국이라는 우산을 벗어나 세계 최강국이 되려는 것, 왕의 신성성을 더욱 강화하고 왕의 실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침략을 미화하는 교과서 개악도 집요하게 추진되고 있다. 침략, 살육전쟁 주역들을 모아놓은 야스꾸니신사는 일본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수상이하 각료 참배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이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떤 도덕과 철학에 따라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공식석상에서 기자가 배석한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한 이른바 망언이 40여회가 넘는 것으로 알수있을 것이다. 지금 일본은 세계2위의 군사대국이다. 헌법에 명백하게 군대의 보유가 금지되어 있고 심지어는 교전권조차 없는 일본군대의 실상이다. 일본 군사예산은 아시아(한국, 중국, 인도, 대만, 인도네시아등 군사강국을 포함한)전체의 군사예산을 합친것보다 더많다. 일본의 경제력은 명실상부한 세계2위이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28%, 일본19%, 독일8%정도라면 그 규모가 이해될 것이다. 요즘 금융구조조정으로 진통을 겪고 있지만 늘 수출이 너무 많고 외환 보유고가 많아서 걱정인 나라이다. 그만큼 기술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동시에 문화상품수출 또한 세계2위의 국가이기도 하다. 이런 일본은 지난시기 벌여온 침략전쟁을 패전으로 규정하고 앞으로 반드시 설욕해야 할 전쟁이라고 벼르고 있다. 요즘 일본을 더욱 야심적으로 만드는 바람이 부는데 이를 총보수화라고 부른다. 형식적이던 헌법마저 고쳐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등장하리라 예상한다. 일본은 한국을 단순히 외국으로 보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국의 안마당으로 알고 언젠가는 되찾겠다는 결의를 속으로 다지고 있다.

일본의 문화정책

한국이 일제시대의 식민의식과 식민문화에 찌들어 있으면서 오로지 강대국 문화수입과 그들 흉내에 열중해 있는사이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의 중요성에 착목하고 자신들이 강점으로 여기는 문화를 중점적으로 육성해 왔다. 이런 작업은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온 70년대 전반기부터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내 경기정책면에서의 문화의 필요성, 국제무역에 관한 문화의 역할과 효용,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문화의 역할과 효용, 외교·방어상으로도 빠뜨려서는 안되는 문화적 친근감 및 문화존경감의 역할과 효용등 이러한 여러 관점을 종합하여 일본의 경제입국정책이 더한층 완성되기 위해서도 이제부터는 문화입국정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日下公人)이런 정책기조아래 추진된 일본문화산업정책은 문화산업이 고수익을 가져오는 상품이라는 점에서 또한 중화학공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상품수출을 촉진하는 촉매제라는 점에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그외에 일본 문화상품은 문화국가로서의 일본의 이미지 제고, 각국과 교역에 있어서의 문제점 해결수단,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는 유력한 외교무기로서의 역할, 일본상품과 일본에 대한 친밀감 조성, 일본에 대한 존경감 만들기와 친일본 세력 만들기등에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문화정책에 대하여 한국의 한 평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일본의 문화침투는 군사동맹으로 구체화될 신군국주의적 대외팽창의 정지작업이면서 동시에 일본 문화산업의 이윤확보를 위한 몸부림의 결과이다. 즉 미국의 전반적 위기의식에 직접적으로 조응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동맹을 위하여 한국국민들의 뿌리 깊은 대일 견제의식을 불식하는 문화적 동질화 작업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추진시키고 동시에 대외팽창의 호기를 고대하는 문화산산업자본의 이윤확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정책과 상호 상승작용을 통하여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김범 1984) 이런 성격은 '한일 문화교류위원회'를 구상한 일본 외무성의 문화교류관이 문화교류를 국가이익에 종속시켜 외교의 일부로 보고 경제관계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일본 학계의 분석에서도 드러난다(平野健一郞 1985, 이상 이지원논문에서 재인용)

한국에서의 일본문화 수용기반

일본문화를 한국사회가 능동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일찌기 고영복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말이나 노래를 통한 영향 ; 원래 일본과 우리나라의 언어구조가 같고 유교문화적 전통의 공통성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문화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 구세대들은 성장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문화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어 일본노래를 즐기기도 하며, 특히 기계용품이나 전문용어 중에는 우리말로 대체되지 못한 일본용어가 허다하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문화는 우리 문화 속에 별로 큰 저항감 없이 자리잡게 된다.
2,일본상품의 범람을 통한 일본문화의 영향 ; 공업화가 한발 앞섰기 때문에 일본상품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상층을 상징하는 심벌로까지 여겨졌다. 또한 이러한 풍조와 관련해서 일본은 적대시하되 일본상품은 선호하는 이중심리가 발견되는데 이는 처음부터 친일세력을 철저하게 규탄하지 않았다는 구조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고 나아가 반공감정에 가려서 친일 추종세력을 용납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그 결과 침략세력으로서의 일본과 선진공업국으로서의 일본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고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사회분위기를 마련한데서 일본문화가 계속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수 없었다.

3,일본문화의 적극적인 모방추세 ; 우리의 근대적인 문화가 형성되기도 전에 일본은 벌써 서구문화를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문화를 모방함으로써 서구문화를 손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법령, 교과서, 잡지, 신문편집, TV프로그램 제작, 대중음악, 취미활동 등등 제도와 문물 일반에 걸친 모방추세는 일본문화에의 의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모방심리의 근저에는 일본 것은 앞서 있고 우리도 세월이 지나가면 일본의 추세를 따라가리라 하는 기대감이 전제되어 있고, 이 점이 일본문화의 매력을 더욱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일본 경제력에의 의존이 일본문화의 득세를 촉진하는 면 ; 우리의 공업화가 대회의존적인 것에서 출발했고 일본의 자본, 일본의 기술, 일본의 원자재에 의존하다 보니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굴종적인 것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는 것이다. 8·15때 물러간 일본 군국주의자가 기업가로 변신, 우리나라에 재상륙하고 있고 그들이 부의 축적을 위해 우리나라를 이용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주변 이득을 보기 위해 일본의 요구에 뒤따라가야 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일본문화는 '선진'의 이름 아래 직수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보다 의도적인 요소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한일간의 문화교류의 역사는 미국 주도의 국제정치적 질서에 규정받으면서, 양국 비판세력의 광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의 협력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물결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은 일본정부와 일본인이 하나로 뭉쳐서 한국에 쳐들어 온다기보다는 일본정부가 밀고 그것을 한국정부가 끌어당기며 상호협력해서 양국의 비판세력들에 대처하면서 이룩해 나가는 것"으로 65년의 한·일협정 체결당시나 84년의 한·일문화교류선언 역시 이러한 경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이상희 1986) 98년의 문화개방정책 역시 같은 기조위에 서있다.

여기에 최근 신세대 및 일반대중의 생활영역으로까지 일본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 이면에는 그동안 양국 권력 엘리뜨 집단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골조 속에서 사회성원들이 알게 모르게 일본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온 기반위에 급속한 경제성장 결과 소비력이 늘어나면서 일부 상류층뿐 아니라 중산층을 발판으로 소비주의가 대중적으로 만연되어 온 흐름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구매 권리라는 관념을 동반하면서 여타의 관념들-기존의 사회규범, 관습이나 민족적 의식등-을 부차화하고 압도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의 철저한 사적 이윤 추구 동기가 다른 사회적 규준들 즉 공익성, 사회복지 및 국가의 규제·조정등의 제도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져온 측면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몇가지 문제점

우리는 이제 몇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천황제 파시즘 때문에 아무도 자유로운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다.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특히 그렇다. 일본과 한국은 우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말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정권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어용친일 언론매체를 통하여 사회에 널리퍼져 이제 자연스럽게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말은 한국인의 동의없이 군사정권이 미·일의 지원을 배경으로 강요한 말이다. 한일협정은 전국민의 반대를 총칼로 누르고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체결되었다. 사후에 국회비준을 받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협박과 공갈이 통과시킨 것이다. 이 협정이 의도하는 바는 동북아 냉전의 강화였으며 냉전진영의 제휴강화였다. 덕분에 한국의 분단선은 더욱 단단해졌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암흑속에 잠겼으며 민족적인 지향과 정서는 당연히 압살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왜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라고 강요해 왔는지를 우리는 다시 묻고 논쟁을 벌여야 한다.
다음으로 한국은 식민지배의 제도적, 이념적, 인적 기초위에 그내용을 계승하여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한번도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약간의 시도를 했지만 될수도 없었고 하지도 못했다. 이런 근본적인 모순위에 민족의 장래를 세울수는 없는일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시도도 해보지 못한상태에서 일본문화의 전면개방이 갑자기 민족문화의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선포되었다.

또하나 우리가 고심해야 할 일은 일본과 공존의 길을 갈것인지 아니면 통합된 예속의 길을 갈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이제 우리는 이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선택한 셈이다. 사회성원들이 그 결론을 모르고 했다면 그 귀결점을 알고 다시 논의해야 한다.

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사항에 대하여 검토했다. 문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며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아직도 식민유제에 짓눌린채 사이비 민족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팽창야심에 젖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역사성이 배제된 논의는 말장난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많은 역사적인 체험을 했지만 그런 체험들이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는 이른바 개방이 늦어서가 아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어떻게 해야 했는가. 침략자에게 강력히 대응하면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철저히 개혁하여 전성원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기운으로 역사발전을 추동해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큰나라 섬기는 것이 골수에 사무친 왕조의 지배층에게는 제 백성이 먹이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잡아먹을 강대국이 오히려 보호자로 보여 청국에, 미국에, 일본에 빌붙어 그 앞잡이가 되어 강토와 주권을 지키려는 백성들 토벌에 앞장서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한국은 근세127년간 이어져 온 타율의 역사가 안겨준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이제는 그 원인을 바르게 분석하고 자율의 역사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민족적 지향을 압살해온 온갖 억압장치들을 폐지하고 민족적 원칙과 기상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지금 이작업에 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민족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엄청난 발전과 신기루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일은 박정희가 아니라 식민지시절 총독들때부터 시작된 정치적 행위이다. 나는 발전이 아니라 민족의 존재자체를 걱정하고 있다. 발전을 위한 기제가 민족을 해체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아무런 면역 체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예방주사도 독일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생균이야 말해 무엇하랴. 자기 정체성과 민족공존의 윤리를 확립하지 않고 지금까지 자신을 파괴해 온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역사의 방향을 잡아서야 희망이 없지 않은가.

(1998년) 김봉우 독도본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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