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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04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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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언의 계보

일본 망언의 계보  

다카사키 소오지 지음 / 최혜주 옮김


① 1948년경 스즈키 망언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정당한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중략)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중략)
재정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 재외재산조사회 편,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 제11책, 대장성, 발행년월일 불명, 2,4,25,57쪽)

※ 1947년 대장성 내에 설치된 재외재산조사회는 1950년에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라는 이름의 전 35책(총목록을 합치면 36책)의 책을 비밀리에 출판했다. 이것은 조선, 대만, 가라후토(사할린)등에서 일본인이 형성했고 패전과 함께 연합국에 의해 접수된 재산의 실태를 밝힌 것이었다.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이들 지역에서 배상을 요구해 올 경우, 그것을 거부하거나 삭감했던 것이다.
조선편은 전 10책으로, 전쟁 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대륙병참기지론'이나 '북선(北鮮)루트론'을 제창한, 조선론의 권위자 스즈키 다케오(전쟁 후에는 도쿄대학 교수)가 편집했다. 그 중에서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은 조선편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출판되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서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일본 보수파의 조선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1949년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1)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중략)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측의 공헌에 의한다.(중략)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반출'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략)
(2)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리에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중략) 이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3) (중략) 이들 지역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각국도 오랫동안 일본령으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의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가지고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적 의도를 배경으로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대일 평화조약관계준비 연구관계" 제5권, 740-742)

※ 이것은 불과 5쪽의 팜플렛을 발췌한 것이다. "문서가 작성된 쇼와24년 당시는 대일 강화에 관하여 각국으로부터 배상문제 등 여러 가지 요구가 나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미국측에 참고자료로서 제출한" 것이다. <<아사히신문>> 1982년 9월 20일자) 자료를 조선에 맞춰 읽어보면, 일본은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고, 한국병합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셈이 된다. 이것도 1982년 9월 20일까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정부관계자의 조선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는 앞의 자료와 같다.


③ 1953년 구보다 망언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 진기 :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 :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조선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 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한국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측 각 위원들 흥분한 표정으로 각자 발언한다.)
홍 :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다 :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 경근 : 천만엔이나 2천만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 태하 :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다 :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 :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다 :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 :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다 :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다 :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 : 구보다씨는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라든가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우리는 양보할 여지가 없다.
('외무성의 회의의사록에 남겨진 구보다와 한국측 대표간의 응수',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 22일자)

※ 10월 15일에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분과위원회 제2회 회합에서,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는 위와같이 발언해 한국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내용이 <앞의 1,2번>과 비슷한 것은 구보다가 그 자료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보다 발언에 대해 오카자키(岡崎勝男)외무장관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한편 변영태 외무장관은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그들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침략근성을 아직까지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는 등, 제3차 한일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제4차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57년 일본측은 구보다 발언을 '철회'했지만, '잘못'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때 도중에서 오프 더 레코드가 되었는데도 외무성이 회의록이 <<아시히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문제삼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④ 1963년 이케다 망언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제 43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5호, 16쪽)

※ 제6차 한일회담의 예비절충이 이루어지고 있던 1월 26일, 공산당의 노사카(野坂參三)가 "조선인민에 대한 이러한 비도덕적인 여러 가지[식민지화나 노예노동의 강요]에 대해서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이 단상에서 분명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이케다(池田勇人) 수상의 답변이다.


⑤ 1963년 시이나 발언

[숙부 고토 신페이(後소新平)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이것은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 이 망언으로부터 2년 뒤에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는 그것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자도 있었지만, 의문을 갖는 자도 적지 않았다. <<한국일보>> 2월 18일자는 시이나의 도착성명과 그 저작인 "동화와 정치"를 다루면서, "유감과 반성"이 어떻게 "영광"과 일치하는 것일까. 시이나 자신은 생각한 끝에 말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말만으로 한국국민이 [시이나가]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할지 어떨지 의문이다."라고 썼다. 사실 시이나는 결코 본심에서 '깊이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눈앞에 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당시 서울에 파견되어 있던 외무성 조사관 마에다의 말)위해 '깊은 반성'을 해 보인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⑥ 1965년 다카쓰기 망언

36년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중략)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이지만...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 1월 7일,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인 다카쓰기 신이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다카쓰기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외무성 간부의 충고를 받고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해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했지만, <<아카하타>>가 폭로함으로써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카쓰기는 한일회담이 중단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것은 공산계의 작위적 보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이코노미스트>> 2월 9일호)라고 줄곧 발뺌했다. <<아카하타>>의 보도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김동조의 "한일의 화해-한일교섭 14년의 기록"(사이마루 출판회, 1993년)에서도 분명하다. 그런데 다카쓰기에게 발뺌하도록 권고한 것은 다름아닌 김동조였다.


⑦1965년 사토 망언

1)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합병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50회 국회 중의원 한일특별위원회의록, 제10호, 2쪽)
2) 이것이 여러가지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조약인 한 이것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음은 굳이 제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50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8호, 18쪽)

※ 1)은 11월 5일 사회당의 이시바시 마사시(石較政강)의 "병합에 관한 조약, 이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자주적으로 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지"라는 질문에 대한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답변이다. 이것에 이어 11월 19일의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공명당의 구로야나기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라고 질문했지만, 답변은 2)와 같은 것이었다.
사토 수상의 견해는 그 뒤로도 유지되어, "병합조약은 합의에 따라 체결되었다."라는 망언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수상의 견해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때이다.


⑧ 1974년 다나카 망언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습니다만, 그 후 한국이나 그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안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1월 24일에 열린 중의원 본회의에서 공명당의 다케이라가 일본에 대한 경제협력 방식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것에 대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의 답변이다.
일본이 김양식을 가르쳤다,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일본정부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더구나 한양대학 교수였던 리영희씨는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세대>> 5월호, 일본어 역은 <<세계>> 9월호)라는 글을 발표해, 다나카 망언을 비판하면서도 "같은 정도의 잘못이 한국인 자신에게도 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것을 열등한 것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식민지 통치시대에 우리에게 실시한 교육을 자랑하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방된 순간부터 독립민족으로서 스스로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존립 이유를 부정한 식민지 교육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는 해가 될지언정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실증해 보이는 데 있었을 것이다. 부정을 부정함으로써만 노예에서 주인으로 된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는가?(중략) 노예가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작업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젖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일이 틀림없는 현실인 이상,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한국인 내지 한국에 유익했다는 다나카의 말을 어떻게 해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말을 앞에 두고, 일본인이 "한국인에게도 잘못이 있다"라는 투로 말한다면, 그것은 골계(滑稽)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⑨ 1979년 사쿠라다 망언

1)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중략)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데 있다. (중략)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 1979년 3월 23일자)
2)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 교육의 결과이다.(중략)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중략)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편집부, '사쿠라다 망언' - 일본 정재계의 대한인식을 묻는다.' <<세계>> 1979년 6월호, 286쪽)

※ 1979년 3월 21일, 경단련 회장인 사쿠라다는 한국경영자협회 주최의 국제세미나에서 위와같이 발언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 최성실 교수 등이 "일본은 과거 한국인에게 경제 과학 기술 등 중요한 분야의 교육기회를 봉쇄하고, 우수한 인재를 매장시켜 발전을 저해했다."라고 반박하자, 사쿠라다는 "잘 모르는 것을 말한 것 같다."(<<동아일보>> 23일자)라고 사죄했다. 3월 27일자 <<동아일보>>가 사쿠라다 망언은 구보다 망언이나 다카쓰기 망언보다 "대한 경시의 정도가 더 심하다"라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역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의 잡지 <<세계>> 6월호도 사카라다 망언을 비판하며, 일본 정재계 인사들의 대한(對韓)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


⑩ 1982년 마쯔노 망언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사히신문>> 1982년 7월 24일자)

※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한국이나 북한, 중국 등이 한창 비판하고 있을 때인 7월 23일, 마쯔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언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양상이 되었다. <<동아일보>> 8월 9일자에 따르면, 마쯔노는 "이토 히로부미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그 살인범인 안중근을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다"라거나, "한일병합은 정당하다"(7월 27일)라는 망언도 일삼고 있다.


⑪ 1986년 7월 후지오 망언 (제1차)

그것은 전 내각에서 끝난 것이므로 더이상의 일은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세계사에서 그같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쪽이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도 인정해야지.
(<<아사히신문>> 1986년 7월 27일자)

※ 7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편집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후지오 마사유키(?尾正行) 문부장관은 위와 같이 대답했다. 한국측의 항의에 대해 주한 일본공사는 나카소네 수상도 "본건 발언이 외국에 오해와 불쾌감을 주었다면 매우 유감이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고, 31일에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8월 22일에 열린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그 망언으로 문제가 된 후지오는, "문부대신으로서 말투가 부적당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부덕이다. 사과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가 개인으로서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망언의 전형이다.


⑫ 1986년 10월 후지오 망언 (제2차)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것은 왠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 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뿌리를 자르려고 하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放言大臣)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 9월 6일자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동월 10일에 발매되는 <<문예춘추>> 10월호에 이상과 같이 발언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인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투의 망언의 전형이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초보적인 오류로, 1910년에 체결된 한국병합조약은 한국통감 데라우찌와 한국 수상 이완용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다. 이토와 고종 사이의 담판으로 체결된 것은 1905년의 한국보호조약이다.
더구나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선사가인 가지무라가 '역사를 굽혀서는 안된다-일한합방의 진상'(<<아사히신문>> 9월10일자 석간)에서 비판하고 있다. 또 "이것을 방치해 두었더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러시아사가인 와다 하루키가 '한국정세와 우리들'(<<세계>> 1987년 3월호)에서 비판했다. 후지오 망언에 대한 일본국민의 비판의 목소리도 각 신문의 투서란을 메웠다.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8일에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의 일이었다.
9일자 <<산케이신문>>은 '주장'에서, "뒤늦게 근대화한 일본은 '침략'전쟁의 책임에 대해 미국 및 영국을 비난할 만한 '서푼어치의 이유'는 적어도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아시아에 대해서는 일리(一厘)도 없다. 후지오 발언에 대해서는 그 분별을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후지오 발언의 기조는 나카소네 수상의 지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후지오씨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문부장관으로 등용한 수상의 정치책임도 동시에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가 "조약법에 관한 빈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 씨를 파면했는가?"라고 질문한 데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더욱이 파면에 대해서는 자민당 강경파의 젊은 중견들이 만든 국가기본문제동지회(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라고 반발했다.


⑬ 1986년 11월 후지오 망언 (제3차)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 문부장관에서 파면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자신의 불만과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 지상에 털어놓았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라는 식의 망언이 총동원되었다. 더구나 이 잡지는 '후지오 발언의 파문'이라는 특집에서 후지오의 지론을 옹호했다. 10월 10일 발매된 이 잡지의 내용은 10월 5일 각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자 아이치대학의 우부가타 교수 등의 호소로 10월 23일에 시민집회 '후지오 발언 문제를 생각한다 - 한일병합조약을 다시 묻는다'가 열렸다.
또 "책임의 일부는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망언에 대해, 지식인 102명은 그 날 낸 "국민과 국회에 호소하는 '후지오 발언 문제에 대해서'"라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한국 조선인이 식민지화된 자신들의 허약함을 반성하는 것과,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의 행위가 비판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 범한 자와 당한 자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 같아, 죽인 자, 범한 자를 면죄하려는 의논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지오는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일본은) 한국에도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⑭ 1990년 오자와 망언

(천황폐하의 '말씀'내용은) 발을 들여놓고 들여놓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만큼, 우리가 의논할 것은 아니다. 천황폐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면 등에서) 노력하고 있다. 이 이상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있는가. 상식선도 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천황이 정치에 연루되어서는 안된다. 천황의 이름을 빌려 권위로서 사용한 것이 과거 역사의 잘못이다.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아사히신문>> 1990년 5월 16일자 석간)

※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천황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을 때(14일)의 망언이다. 이것은 당초 자민당의 수뇌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는데, 16일 오자와 이치로 자민당 간사장은 자신의 발언임을 인정하면서, 이 발언에 대해 한국측이 강하게 반발해 양국관계가 험악해진데 대해 진사(陳謝)했다. 그러나 6월 1일자 <<주간 아사히>>에서는 "기본적인 것은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없다'는 등의 말은 애초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략) 예를 들어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끌어내려고 한다면) 머리를 숙이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니 더 숙여라, 또는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머리를 숙여라든지, 손을 짚고 사죄하다가 나중에는 땅에 엎드려 조아려야 하는 사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이 양국민의 감정적 대립을 초래할 뿐, 한일우호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밝혔다.


⑮ 1995년 와타나베 망언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중략)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으로 되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나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 6월 6일자에 따르면,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6일자 사설에서 '망언'이라 비판하고, <<아사히신문>>도 6일자 사설 '역사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가'에서 "우리도 놀라 기가막혔다."라고 썼다.
한국의 이홍구 총리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충격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일본측도 이러한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반성의 계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와타나베는 5일, '원만히'라는 부분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는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국회(<7번>)에서 소개한 사토답변)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다.
그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이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제134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4호, 19쪽)라고 대답하여, 한국 및 북한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받았다. 한국 외무장관은 사토 답변의 재검토와 한국병합조약의 무효확인을 요구했다. 10월 13일 무라야마 수상은 국내외의 비판에 대해 생각한 점이 있었던지, 다음과 같이 1965년의 사토 답변을 정정하고 정부견해를 일부 수정했다. "당시의 일이므로 위협과 강박(협박의 잘못)이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있었다 없었다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결코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34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의록, 제4호, 15쪽)
그리고 1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병합조약은 "민족의 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조약이다."라고 쓰고 있다. 30년만의 일보 진전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유효'라는 입장은 변경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 국회는 16일 본회의에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늑약(勒約)에 대한 일본의 정확한 역사인식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일본은 한국과 북한으로부터 병합조약 당초부터의 무효 확인을 줄곧 재촉받고 있다.


16. 1996년 에토 망언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중략)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습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중략)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다.(중략) 일본인이 보면 거기(조선반도)는 결코 식민지라는 의식은 없었다.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지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이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은 없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속에서 날치기 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중략)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 한국인 크게 활약하고 있다. M H, M K, I H 모두 그렇다.(주: 발언은 실명) 야구선수도 L의 사장도 모두 그렇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라. 한국사람들 뿐이다.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다. 일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모든 계층에서 한국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오프 더 레코드로 이상과 같이 말했다. 잡지 <<선택>>, 이어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문제가 되었다. <<동아일보>> 11월 8일자에 따르면, 에토는 "한일병합은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다"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8일에 발언을 취소하며 병합조약은 "강제적으로 조인"된 것을 인정했고, 10일에는 " '좋은 일도 했다'는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독선적인 생각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3일에 사임했다. 역사학자인 유영렬은 "철도는 상품과 군대를 운반하는 침략을 위한 상징이었다."라는 것. "합방이전에 이미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라는 사실을 들어 에토 망언을 비판하고 있다.(<<동아일보>> 12월 8일자)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라는 등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한편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 마찌다는 에토 망언에 대해 언급하고, "대국의 국민답게, 맞은 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한일 양국의 골도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떤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마이니치신문>> 1996년 1월 24일자)


맺음말

이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 이외의 망언도 많다. 1958년의 사와다 망언은 그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쳐 (38도선을) 거기에 설치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임무이자 한일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오면, 일본은 당장 캄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은 지하에 잠든 조선관계 선배들의 영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치는 문제는 내가 유엔에 있을 때, 지금 한일회담 한국측 대표인 임병직과 굳게 약속했다.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의제는 사소한 것들로, 우리는 이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아카하타>> 1958년 6월 21일자)
이러한 생각은 당시 '부산적기론'이란 불렸다. 6월 11일 제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 사와다는 '한일회담의 정부대표를 둘러싼 모임'에서 위와 같이 연설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이 전한 것을 <<아카하타>>가 소개했을 뿐, 일반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4일에 열린 제29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이마가 사와다 망언의 속기록과 테이프에 의거해, 사와다는 "이승만이 38도선을 압록강 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데는 일본인이 무기를 들고 응원하는 대신, 한일회담에서 될 수 있는 한 양보해 이를 원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문제삼자(제3호 의사록, 8쪽), 기시 수상은 "사와다 전권이 여러 장소
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정부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피했다. 25일에 열린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회당의 다나카가 사와다 대표의 파면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의 망언도 유명하다. 1963년 12월, 방한에 앞서 "박 대통령과 나는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라고 말하고 방한중에 "한국에는 원양어업이 필요없다."고 말해, 한국의 야당이나 국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아사히신문>> 1963년 12월 20일자)
1995년 12월에 다시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이,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해(<<아사히신문>> 12월 9일자), 한국 외무부 대변인으로부터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비판받았다.(<<아사히신문>> 12월 20일자)
그런데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된 망언이, ① "병합조약은 합의에 의해 체결되었다.", ②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다.", ③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세가지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①은 1995년에 이르러 겨우 정부견해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러나 ②와 ③은 아직 명확히 부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 에토 망언 등이 이어지는 토양이 있다. 그리고 새로 나온 오자와 망언은, 이들 망언을 망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정치가가 지금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망언이 망언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성과를 국민 일반의 역사인식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교육이 새롭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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