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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04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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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 공연상품 개방의 문제점

일본 대중문화 공연상품 개방의 문제점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기점으로 한일양국은 새로운 현해탄 문화교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양국 수뇌간의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대통령은 '상당한 속도'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천명했고, 따라서 그동안 적지않은 논란을 빚어온 일본 대중문화의 공식적인 한국 상륙은 기정사실의 카운트다운으로 들어갔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 중에 공약으로 제시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일년도 되지 않아 현실화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십개월 간의 수순은 왠지 말끔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주요한 문화정책의 하나가 마치 선거전의 바람몰이처럼 대세굳히기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며, 구체적인 절차와 대안의 상정 자체가 함구되다시피 한 채로 집권자의 일방통행적 의지로 관철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공동개최로 미우나 고우나 새로운 현해탄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우방 아닌 우방 일본과 본격적인 대중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수행해 가야 한다는 원칙 자체마저 부정하는 시대착오론자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위적인 원칙이 현실속에 실현되기에는 합리적인 전제조건과 시민적 컨센서스를 도출해 내기 위한 충분한 사전의 토론이 선행되어야 했다. 나아가 그 개방을 통해서 외교적으로 어떤 반대급부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거론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국가 기밀에 준하는 사안인지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고 아무런 대응방안과 후속조치들이 발표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상황은(대통령을 제외한) 현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이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에 대해서 아무런 전략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실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대통령은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정상회담을 통해 원칙이 대내외에 천명되고 말았다. 이번 회담의 피상적인 내용만으로 본다면 우리는 일본 문화산업의 한국 상륙을 내주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사과와 2.3%의 저렴한 이자가 붙은 30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낸 셈이다. 고작 이걸 얻으려고 해방 이후 굳게 닫아 왔던, 아니 굴욕적인 저 3공화국의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도 검토되지 않았던 대중문화의 문호를 열어젖힌 것일까?

의심은 점점 증폭된다. 과연 무엇 때문에 현정부의 수반은 충분한 현황파악과 장기적인 대비책의 마련도 없이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에 이토록 급급했던 것일까? 여기엔 어쩌면 보통의 시민이 알 수 없는 거대한 흑막의 거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김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부터 자신을 문화대통령으로 자처했고 21세기가 문화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 첫 발자국이 이처럼 아무런 검증없는 모험으로 새겨지게 된 것은 정말이지 유감스럽다. 아니 이 개방조치가 새로운 문화 국치의 원년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현 정부는 과연 지니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문화가 21세기의 '지구촌'시대로 나아가는데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은 하나의 뜨거운 감자임이 분명하다. 세계가 바야흐로 하나 되고 있는데 가까운 이웃 나라의 문화에 대해 빗장을 꽁꽁 잠궈왔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옛날의 비극적인 한일 역사 관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하는 자책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과연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해야만 우리의 문화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고 21세기의 세계화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것인가?

아직 식민지의 역사에 대한 양국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은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개방론자들은 그것이 너무 '민족 감정'에 치우친 시대착오적 관점이라고 비판하다.

그러나 개방론을 뒷받침하는 입장들도 곰곰히 따져보면 '세계화주의'의 맹목적인 '감정'에 치우쳐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왜 일본문화를 개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을 이들은 아직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 입장은 단지 일본 문화가 이미 음성적으로 국내에 자리잡았다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일본문화를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우리 문화의 수준을 향상시켜 가야 한다는 소박한 이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천진난만한 발상이다. 문화는 더 이상 인간, 혹은 민족의 창조적 산물이자 자유로운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또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총성만 없을 뿐이지 국가간의, 산업간의 치열한 전쟁이 된 지 오래이다. 미국과 EC간의 WTO협상을 보라. 세계 문화시장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대중문화의 과도한 유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문화의 자존심이나 진배없는 프랑스는 보호무역 철폐라는 WTO의 기본 원칙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나아가 그 나라의 주력 산업인 농업 부문을 희생하면서 까지 미국 대중문화의 자국 시장 진출에 대해 일정한 규제의 제동을 걸었다. 여기엔 문화의 주도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프랑스 정부의 고뇌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문화를 통해 진정한 세계화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문화적 상황과 그것의 역사적인 조건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문화 지정학은 참으로 묘하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나라들과 문화가 단절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정부를 필두로 하여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자는 이들은 왜 아예 일본보다 더 가까이 있고 더욱이 같은 민족인 북한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가? 한 민족간의 문화적 동질성도 확보하지 못하는 나라가 과연 세계화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에 대해 결코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엑스 재팬의 음반을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고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이라는 화두에서 가장 본질적인 명제는 대중문화 그 자체의 문화적 성격이 아니라 개방의 과정을 통해 상륙할 일본 문화산업 자본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끼칠 파급력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상의 현실론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90년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한국사회가 대중문화에 대해 충분하지는 못하나마 그래도 대중적으로 합의한 것은 문화는 자동차나 반도체와 다름없는 국제적으로 경쟁의 대상이며 국가간 헤게모니의 현실적인 구성요소라는 지극히 당연한 공리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나라는 90년대에 와서야 대중문화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히 물질적인 것이며 국가 경쟁력의 지표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미국의 연방정부가 이미 1920년대 중반에 이와 같은 인식에 도달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은 64년 도쿄 올림픽을 전후하여 또한 이러한 인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문화 경랭력이 상대적으로 엄청난 열세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긴요한 문제는 세계1,2위의 문화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산업이 한국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원칙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내수시장보다 해외시장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미국의 문화산업은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전력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지 않고서도 영화의 경우, 1987년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국내 직배를 시작한 이래 10년이 되지 않아서 한국 영화시장의 8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장악했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흥행영화들이 우리 시장에서 춤추는 것을 그저 뜬눈으로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수 시장은 막강하나 세계시장 진출에 실패한 일본의 문화산업은 경우가 다르다. 이들은 막강한 자본력과 뛰어난 마케팅 노하우를 살려 그들과 문화적 감수성이 비교적 친근한 동아시아 시장의 주도권이라도 장악하지 않으면 정체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국면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중국어 문화권의 화교 문화산업 자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일본이 홍콩이나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이 여의치 않은 이유다) 또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유효한 상태라는 사실을 감안하다면 일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봉은 자연스럽게 한국시장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임진왜란과 강화도 조약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상기한다면 세계2위의 일본 문호산업에게 대륙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되는 한국시장이 어떤 의미를 가질 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한국시장을 150개가 넘는 세계 시장의 하나로 보는 미국과는 달리 일본에게 한국 시장은 다음 세기에 자신의 문화산업이 확장하느냐 답보하느냐의 여부가 걸린 전략적인 요충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 역학의 배경을 지닌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을 목전에 둔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지금 말로만 문화의 국제 경쟁력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떠들고 있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분야가 최소한의 자생력도 지니지 못할 만큼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은 우리 문화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목졸라 왔으며, 천민적인 영세 문화산업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찬 밥 더운 밥 가리지 않고, 마피아적인 유통체제는 이미 출판 도매상과 음반 도매상의 몰락에서 보았듯이 최소한의 긍정적인 시장 논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냉혹한 비수를 속에 품고 있는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을 운운한다는 것, 우리 문화의 세계시장 진출을 독려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더군다나 '상호교류'를 통해 우리의 문화산업이 선진적인 일본의 노하우를 배우고 나아가 우리의 문화상품이 일본시장에서 엔화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정말이지 안타깝다. 도대체 이런 망상에 가까운 기대를 유포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일본보다 더욱 막강한 미국과 오래 전부터 문화를 '교류'해 왔지만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 그들이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가? 재미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의 문화상품이 미국시장에 상륙해서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 있기나 한가? 미국영화의 미국시장 점유율이 99%라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상기하자.

쌀의 자급 문제가 그런 것처럼 대중문화 역시 이제는 총성이 없는 전쟁이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개될 이 전쟁에 비과학적인 낙관론이나 요행을 바라는 심정으로 전선에 뛰어드는 어리석음을 취할 순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본 대중문화의 즉시/전면 개방은 지금 우리에게 결코 시급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문호가 중심을 잡고 나아가 세계시장에서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품으로 얼룩진 문화산업 부문을 가장 효율적으로 정비함으로써 자체의 응전력을 갖출 수 있는 청사진과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정책 담당자들과 문화계 종사자들, 그리고 우리의 문화수용자들이 그리 여유있지 않은 시간표 위에서 강력한 집중력으로 국내 문화시장의 구조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실천이다. 크고 작은 규제를 풂과 동시에 장기적인 지원정책을 수립하고, 거대한 공룡이 되어 버린 방송의 군살을 빼며, 복마전과 같은 문화의 응전력을 높이는 것이 이십세기에서 이십일세기로 마악 넘어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그것이 언제 이루어지겠냐고 냉소적인 눈으로 쳐다보지 말자. 우리는 건국 이후 50여년 동안 대중문화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올지 탄압과 멸시를 자행해 온 이상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살아왔다. 단 한번이라도 대중문화에 대한 진흥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며, 그것을 평가하는 경험을 축적해갈 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일본 대중문화를 누리려는 시민의 문화향유권이 먼저인가? 아니면 우리 대중문화의 튼실한 인프라의 확보가 먼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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