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일 수교와 침략의 과거 오는 17일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다. 이번 방문을 통해 북·일간의 국교 정상화는 물론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동안 북한과 일본은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을 10년이 넘게 진행해오고 있다. 1945년부터 기산한다면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불편한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허비해 온 것이다. 곧 진정한 우호협력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과거 동아시아 파탄의 원인이 일제 침략 행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 책임의 대가를 분명히 치루는 일부터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껏 떳떳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기껏 수사적인 발언으로 모면하려 들거나 때로는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되묻는 억지 주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근래엔 실종된 일본인들의 납치 의혹을 제기하여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다. 일제 침략에 대한 과거청산은 북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 남북한 전체 민족사의 문제이다. 그러나 지난날 남한 당국은 이런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한마디로 40년간 침략의 죄상을 덮어 버렸다. 또 청구권문제 협정에서 국민의 재산 권리 등 일체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합의했다. 당시 박정희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한 통치자금 마련에 급급하였고 그 결과 역사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1965년 조약의 경우는 부당한 내용이 합당한 절차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1910년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합방조약 못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이 잘못된 기본조약으로 인해 한·일 양국은 국교가 수립된 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과거청산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따라서 북한이 지난날 남한 정권이 해결하지 못한 이런 문제까지도 함께 처리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박정권과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을 원용하고 싶어한다. 혹은 지난날의 잘못된 국제 관행을 에둘러치면서 대한제국과 일제의 합의에 의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1995년 일본총리 무라야마는 국회에서 “한일합방조약은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 실시되었다”고 주장했고 그후에도 이같은 언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이 집착하는 국제관계란 미·일간의 태프트-카쓰라협정, 영·일 동맹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위한 밀거래 약관같은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유효하다고 내세우는 대한제국과 일본의 협정문이라는 것들은, 서울대 규장각의 이상찬 박사가 규명해낸 바처럼, 모두가 최소한의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기만적인 것들이다. 서명을 위조했거나, 협정문의 제목조차 갖추지 못했으며, 조인 비준 등의 절차는 물론 날짜를 조작했고, 혹은 체결되지 않은 것을 외국에 허위로 통보하는 등 날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궁색한지 일본은 또다른 현안으로 10여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납치 의혹이 북·일 관계정상화의 최대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40여년간 수많은 인명을 손상시킨 일제의 침략행위와 민족을 파멸시키고 재산을 약탈해간 일쯤은 국제관행에 따른 합법적인 일이므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인가. 일본은 이렇게 아직까지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과 약탈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상태에서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또다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본은 지난 세기의 잘못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총리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지역 공동체의 성숙한 구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2002.9.9.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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