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人납치에 묻힌 식민36년 북·일 정상회담이 끝난 지금 일본 외교 관계자들은 신중하면서도 조용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예상 외의 실리를 챙겼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특별히 과거 청산에 있어 95년 아시아 각국에 발표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를 토대로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고통과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한다”는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서 매듭짓고, 납치 일본인들에 대한 이슈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외교적 승리를 거뒀다. 정상회담이 끝난 지금, 납치 일본인이 8명이나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저질렀던 36년간의 오욕의 역사는 간 곳 없이 묻혀 버리고 적반하장 식의 인권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물론 북한이 일본인들을 납치하고 8명이, 그것도 대부분 2년 이내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며 국제사회로부터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일제하 36년 동안 한국인들을 부지기수로 강제징용의 이름으로 끌고 갔고, 군대위안부 여성들이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전장에서 죽어간 사실을 일본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처리하는 인상이 짙어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북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보면 과거사 문제에 있어 한국보다 더 강경하게 주장해 오던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코가 꿰어 한 마디도 못하고 납치 일본인 문제를 사과하기에 급급하니, 돈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통한의 역사 문제를 이토록 가볍게 다뤄도 된다는 말인가. 북·일 정상회담이 끝나고 난 지금 북한은 납치 일본인을 남한에 공작원을 파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불량국가의 확증을 또 한번 인식시키는 데 머물러 있을 뿐, 칼자루는 일본이 쥐게 된 형국이 돼 버렸다. 북한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는 그 나름대로 죄값을 치러야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10여명에 불과한 일본인의 인권이 36년간 희생된 한민족의 인권문제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있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우리 정부는 좌시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북한이 엄청난 식량 부족과 미국으로부터의 안보 압력을 피하기 위해 일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미국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외교 행보를 해왔다. 지난 7월 31일 브루나이에서 개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북한의 백남순 외상의 비공식회담을 주선한 것도 일본이었다. 지난 8월 30일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사실이 공표되자 예상치 못한 일에 일본 국내와 세계 각국이 깜짝 놀랐을 정도로 일본 외교는 암암리에 진행돼 왔던 것이다. 돈이라면 입에서 손이 쑥 나올 정도로 다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북한을 일본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여유롭다. 북한에 대한 과거 청산은 일본의 전후 처리의 마지막 걸림돌이고,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과거 문제가 그야말로 청산되면 일본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적 구속 때문에 자위대를 군대라 부르지 못하는 절름발이의 경제대국 일본을 그들이 말하는 보통국가, 즉 정치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 모두를 필요할 때마다 함께 사용할 있는 정상(正常) 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국가 변동 전략을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성취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역사의 문제로만 한정하면 일본과의 의견 차이를 절대로 좁힐 수 없다. 그래서 총리가 사죄하고 각료나 그 밖의 인물들이 망언을 계속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시대는 세상 모두가 제국주의 시대였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 말이 일본의 진심이다. 이제 우리는 차갑고 분명하게 일본의 침략행위를 군대위안부나 강제징용 등의 인권문제로 다뤄야만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가치관인 인권(human rights)의 문제는 선진국을 지향하는 일본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들 스스로도 인권의 문제를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오욕의 역사가 인권 문제의 차원에서 다뤄질 때 왜곡되는 불행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과거사 문제가 소홀히 다뤄져서는 안 된다. 2002.9.27.문화일보/ 김경민(한양대교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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