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무새 일본 요즘 일본 신문을 읽는 재미가 많이 없어졌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테마가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신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납치다. 멀리는 9·17 북·일 정상회담, 가까이는 지난달 15일 피랍 생존자 5명이 귀국한 뒤부터다. 정치면은 일본정부의 납치 피해자 대책이 줄을 잇고 있고 사회면은 생존자 5명의 일거수 일투족이 매일처럼 올라온다. 특히 보수 성향이 짙은 신문일수록 더욱 그렇다. 잡지쪽으로 가면 얘기는 더욱 심각하다. ‘일본을 표적으로 한 (북한)대포동 미사일’ ‘북한이 사망자로 통보한 납치자 8명은 살아있다’는 등 제목만으로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쉬 짐작이 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런 보도를 보면 ‘악의 축’ 발언을 한 미국은 차라리 신사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의 북한은 일본에 악마에 가깝다고까지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북한이 정부간 합의 위반을 거론하며 생존자의 선 귀국을 주장하면 일본은 ‘납치 원점론’을 내세우며 생존자 가족의 일본 귀국이 우선이라고 반박한다. 납치라는 사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무슨 약속 위반 운운하느냐는 투다. 반면 북한측이 거론하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과거사 원죄론’에는 입을 다문다. 24년 전에 이뤄진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지만 과거 그들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을 감는 모습이다. 그런 일본에서 최근 야스쿠니(靖●) 신사 대체시설 건립과 관련한 얘기가 나왔다. 관방장관의 사적 자문모임인 ‘추도·평화 기원을 위한 기념비 등 시설 검토 간담회’의 중간보고서 내용이다. 자문모임은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이후 주변국의 반발이 거세자 야스쿠니를 대체할 새 시설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설치됐다.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 세계 누구라도 부담없이 전몰자에 대한 참배가 가능한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자문모임이 내놓은 보고서의 골격은 이렇다. 첫째, 신설 추모시설은 추도와 부전(不戰) 맹세를 목적으로 무종교 시설로 한다. 둘째, 추도의 대상은 1867년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대외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로 한다. 단 태평양전쟁 A급 전범과 외국인을 추도대상에 포함시킬지 여부는 유보한다. 새 추도시설의 성격을 ‘무종교’로 규정한 것은 일본의 총리가 종교시설인 야스쿠니를 찾는 것이 ‘정·교분리 원칙’과 위배된다는 비난을 막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두번째 대목의 단서조항이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은 A급 전범의 분사(分祀)를 요구하고 있지만 보고서는 유보했다. 일본 언론은 “추도 대상은 방문자의 ‘마음의 문제’로 남겨두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에 새 시설이 지금의 야스쿠니를 대체할 시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신설되는 시설이 야스쿠니를 대체하는 시설은 아니며 야스쿠니는 야스쿠니다”라고 못박았다. 대체시설 설립 여부에 관계없이 야스쿠니에는 계속 가겠다는 뜻이다. 고가 마코토(古賀誠) 일본 유족회 회장은 “야스쿠니는 유족들의 정신적 중핵시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설명을 들으면 굳이 대체시설을 만들 까닭이 없어진다. A급 전범들에 대한 추도에는 집착하면서도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침략전쟁의 피해자에게 마음속으로 죄의식을 느낀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지난 10월말 멕시코 APEC 정상회담에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무려 3차례에 걸쳐 “야스쿠니에는 다시 가지 않는 게 좋다”며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흔히 외교는 서로간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한다. 국가간 신뢰는 역사 공유와 평화에 대한 목표를 함께 추구할 때 가능하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한 우이독경(牛耳讀經)인 일본의 태도에서 신뢰를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박용채/도쿄특파원pyc@kyunghyang.com〉2002.11.21.경향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