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신예 이지스 함 ‘전시 수역’ 발진…평화헌법 슬금슬금 무력화
일본 해상 자위대의 최신예 이지스 함 기리스마 호가 미국의 대(對) 테러 전쟁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벌써 한달 가까이 대양을 누비고 있다. 이 배는 지난해 12월16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 요코스카(橫須賀) 기지를 출항해 인도양으로 향했다. 임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 테러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영국 함정에 연료를 제공하고 있는 자국 소속 보급함 호위이다. 이 배는 1월 초에 인도양 북부 아라비아 해에 도착해 호위함 히에이 호와 임무를 교대한 후, 앞으로 4개월 간 작전에 나설 계획이다.
일본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테러 지원 특별법을 제정해 전후 처음으로 전시 수역에 자위대 병력을 파견했다. 보급·수송 작전에만 참가할 것이라고 강조해 왔지만, 그동안 파견 여부를 놓고 신중한 자세를 보여왔던 이지스 함을 슬그머니 아라비아 해에 보냄으로써 전투에 참여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일본의 이지스 함은 고도의 전투 정보 수집·분석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시 수역에서 함께 작전 중인 미군과 전투 정보를 교환할 것이 뻔하다(81쪽 상자 기사 참조). 이는 결국 후방 지원 업무를 넘어서 실질적인 전투 행위에 일본이 가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평화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집단 자위권’(동맹 국가가 무력 공격을 받을 때, 이를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지원하는 국제법상의 권리) 발동으로 볼 수 있는 데다가, 실제로 전투에 휘말려들어 교전이라도 벌어지면 ‘교전권’을 부인하고 있는 헌법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 명의로 전투함 파견 요청해달라”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애초에 반 테러 전쟁 지원의 원칙으로 △전투 지역에는 가지 않으며 △전투 행위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이지스 함 파견으로 실제로 전투 행위에 나설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졌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세 차례나 이지스 함 파견을 보류했으나, 9·11 테러 이후 국제 반 테러 정책 공조에 호의적인 국내 여론과 일본의 군사적 역할 분담을 바라는 미국의 지원에 힘 입어 결국 전쟁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여기에는 일본 군부의 로비, 고이즈미 총리와 매파 정치인들의 지원이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이지스 함을 전시 수역에 내보내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전세계에서 첫손 꼽힐 정도로 최신예 함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매우 짧은 주기로 함정을 교체하기 때문이다. 그런 해상 자위대가 건조한 지 28년이나 된 폐기 직전의 호위함을 문제의 지역에 파견한 뒤 ‘낙후된 함정으로는 작전 수행이 어려우므로 이지스 함을 보내 임무를 교대하게 하겠다’고 둘러댔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해 5월에는 해상 자위대 간부가 주일 미국 해군사령관을 방문해 미국 정부 명의로 일본 정부에 이지스 함 파견을 요청해 달라는 내용의 메모를 전달해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번 이지스 함 파견은 결국 탈냉전 이후 적극적으로 군사력 확장의 길을 걸어온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노력한 끝에 얻은 결실인 것이다.
일본은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전쟁 비용 1백30억 달러만 내고 병력은 파견하지 않았다가 돈은 돈대로 내고 미국으로부터 면박당한 일을 아직도 치욕스러워하고 있다. 그 뒤 평화유지군법, 이른바 ‘PKO법’을 제정해 자위대 해외 파병의 길을 열어놓더니, 마침내 1997∼1998년 미사일 위기와 북한 공작선의 영해 침범 사건 이후에는 ‘주변 사태법’까지 만들어 일본 주변의 동아시아지역 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에 덧붙여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테러 지원법을 마련해 원양에 전후 최초로 자위대 함정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이른바 ‘세계 최강’이라는 전투함을 실전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 ‘집단 자위권’에 대한 해석은 더욱 모호하게 되어 군부와 우익은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평화 헌법 개정(또는 무력화) 작업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12월27일 일본 〈요미우리 신분〉은 이라크가 이처럼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일본을,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 적국으로 지목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안전을 보장받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시민단체와 야당은 일본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만 시민단체의 작은 목소리와 지리멸렬한 야당의 공세에 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사히 신분〉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0% 이상이 이지스함 파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점점 늘어나는 일본 자위대 해외 파병
1991년 4월 페르시아 만 전쟁 종전 후 지뢰를 제거할 소해(掃海)모함 1척과 소해정 4척 파견.
1992년 9월 캄보디아에 육상 자위대 파병. 유엔 평화 유지 활동.
1993년 5월 모잠비크에 육상 자위대 파병. 유엔 평화 유지 활동.
1996년 1월 중동 골란 고원에 육상 자위대 파병. 유엔 평화 유지 활동.
2001년 11월 미국 대 테러전 지원을 위해 호위함 2척·보급함 1척을 선발대로, 소해 모함과 보급함·호위함 각각 1척을 본진으로 파견.
2002년 2월 동 티모르에 육상 자위대 파견, 유엔 평화 유지 활동.
2002년 12월 미국의 대 테러전을 지원하는 호위함과 임무를 교대한다는 명분으로 이지스 함 파견.
최승광 (자유 기고가) jeffrey@hosanna.net
2003.1.16. 시사저널 69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