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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인권만 챙기는 일본

제나라 인권만 챙기는 일본  

일본이 대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 가운데 한국 사람들의 공감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을 꼽으라면 원폭 피해 문제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의혹 사건이 그 선두를 차지할 것이다.
최초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은 그 참상을 부각시키며 핵무기의 근절을 외교정책의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차원에서 포괄핵금지조약 발효 운동을 주도하고 있고 핵 실험국에 대한 경제제재에도 적극적이다. 원폭 피해지역에 있는 히로시마돔을 유네스코의 국제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는 등 원폭 피해국으로서의 이미지 제고에도 열심이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힘의 외교에 밀려 핵무기 저지 외교의 후퇴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원폭 피해를 강조하는 일본에 대해 매우 냉담하다. 김지하 시인이 1990년 원폭 피해 참상에 관심이 많은 일본의 문호 오에 겐자부로와 한 대담에서 “왜 일본인들은 중국 난징대학살과 강제징용, 군대위안부, 투옥, 고문 등 자신이 저지른 만행은 속죄하지 않고 원폭 피해만 얘기하느냐”고 한 비판은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잘 대변해준다.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인간 존엄성의 파괴라는 면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임이 분명하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일본인 납치의혹 사건과 관련해 북한에 대해 파상적인 공세를 벌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지난주 한국을 방문하기 전 한국 특파원단과 한 회견에서 “북한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등 협상하기 매우 어려운 정권”이라고 한 데 이어 한국을 방문해서도 “납치사건을 빼놓고 식량 등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대북 강경자세를 명확히 밝혔다. 비슷한 시기에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은 북한을 `동아시아의 문제국가'로 지목했다.

일본이 최근 납치의혹 문제와 관련해 강경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83년 영국 런던에서 유학 중에 실종된 아리모토 게이코를 북한에 끌고가는 데 관여했다는 증언자가 나오고 언론들이 이를 계기로 납치의혹 문제를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치사건 해결없이 북-일 국교정상화는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은 이런 여론의 반영이다. 또 일본 정부는 그동안 7건 10명이라고 주장해온 납치의혹 명단에 아리모토를 더해 8건 11명으로 수정했다.

납치의혹 문제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성격이 원폭 피해와 매우 비슷하다. 일본은 이를 대단한 인권문제이자 국가주권 유린 문제로 제기하면서도 북한이 제기하고 있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는 피해자 및 그 가족·후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인권문제다. `과거사'라는 추상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인권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양국이 가한 폭력의 크기를 양으로 환산하자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물론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죄가 북한이 현재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죄보다 훨씬 심하니까 일본의 문제제기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니다. 원폭 피해도 납치의혹 문제도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제기할 만하다. 다만 이런 주장이 보편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나의 피해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입은 피해도 똑같은 무게로 느끼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 일본인 납치의혹이 한국민으로부터 마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일본 쪽의 주장에서 그런 자세를 느낄 수 없는 탓이다.

오태규/ 도쿄특파원ohtak@hani.co.kr 2002.3.26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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