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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국역사 - 5. 임나일본부설의 허구<下>



가야 철기 기술의 일본 전파
경북 고령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갑옷 및 투구(왼쪽)와 일본 고분시대(4∼7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및 투구. 당시 가야의 철기 기술이 일본을 훨씬 앞질렀다는 점에서 오늘날 일본의 학자들도 가야문명의 일본 전파 내지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사진 제공 일조각출판사

일제 어용사가들의 ‘임나일본부설’도 그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를 읽어 보면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일본’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것은 7세기 말∼8세기 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4∼6세기에 어떻게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의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될 수 있었겠는가. 명칭부터 ‘일본서기’ 편찬자가 날조한 것이다.

 둘째, 일본 야마토 왕국이 4∼6세기에 한반도의 6가라를 점령해 직할 식민지를 만들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이나 통치했다면 이 엄청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사서들이 한 줄이라도 다루지 않을 리가 없다. 또 일본서기에 단지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에서도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이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자가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기에는 일본 열도의 일이 한반도 내 사건처럼 다수 기록돼 있다. 예컨대 흠명기 23년(553년) 8월 초에 일본의 흠명왕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앗아 와서 흠명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꾸민 일제 어용학자들처럼 이 기록을 한반도 평양의 고구려 기사로 해석하면 야마토 왕국의 흠명왕이 553년에 한반도의 고구려 수도 평양을 습격 점령한 것으로 되고 명백한 역사 날조가 될 것이다. 고구려가 야마토 왕국에 수도나 왕궁을 습격·점령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거리가 멀고 매우 강성했으므로 후안무치한 일제 어용사가들도 일본서기의 이 명료한 고구려 궁성 점령 기사를 갖고서도 차마 ‘야마토 왕국의 고구려 수도 정벌설’을 꾸며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이 기록을 일본 열도에 이주해 간 야마토 왕국 부근의 고구려 이주민 마을의 촌장 집 습격 사건이라고 해석하면 그 짧은 거리나 대장군의 노획물의 영세한 규모가 설명된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자치촌, 소분국을 다수 형성해 살고 있었다. 같은 흠명기의 임나 관계 기사들도 이러한 이주민 자치마을, 소분국의 기사가 아닐까?

 넷째, 한국 역사에서 실재했던 가라국은 임나를 포함해서 6가라, 임나를 빼면 5가라 체계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의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임나는 10개 가라체계로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찬(乞찬), 염례(稔禮) 등 10가라가 공존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일제강점기에 총동원돼 그들의 10개 가라를 한반도에 비정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나 4개 정도를 비슷하게 찾아내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반면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북한 김일성종합대의 김석형 교수와 그 제자들은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냈다.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를 둬 통치했다는 10개 가라국은 한반도 내의 6가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주해 들어간 6가라 계열 이주민들의 소분국들과 관련된 것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다섯째, 일본서기 흠명기 2년(532년)에는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安羅)일본부’가 병존하여 신라에 항복한 임나의 부흥대책회의가 거론되는가 하면 안라일본부 관리가 흠명왕의 견책을 받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이 한반도 내 일이었다면 모순된 기술이다. 한반도에서 안라는 아라가라(김해가라 또는 함안가라)이고 임나는 본가라(고령가라)로서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안라가라이고 임나는 그 훨씬 뒤 30년 후인 562년에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일본부가 532년 이후 기사에도 나오므로 이것은 한반도 안의 일이 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부의 내용도 임나 또는 안라의 관리들과 연락하는 야마토 조정의 2명 정도의 연락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나일본부나 안라일본부는 일본 열도 안에서 야마토 조정의 일본 열도 안 가라계열 이주민 자치촌의 연락사무소 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섯째, 일본서기에는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계속 야마토 조정에 조공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나(고령가라)가 신라에 병합돼 사라진 것은 이보다 70여 년 앞선 562년(신라 진흥왕 23년, 일본 흠명왕 32년)의 일이었다. 이 역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열도 안에 있던 기관이었고 임나도 일본 열도 안의 소분국 임나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직할 식민지를 설치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 통치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일제 어용사가들이 날조한 허구임이 명명백백한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한 후 황국사관에 의거한 역사 날조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도 반성이 일어났다. 그 결과의 하나가 일본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구하여 밝히면서 나온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이다.

 이 학설은 한반도로부터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지방으로 이동해 들어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제10대 왜왕 숭신(崇神) 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제1대∼9대 천황을 가공인물로 보았다. 그리고 제15대 왕인 응신(應神) 때 동정(東征)을 하여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한다. 가라→기타큐슈→기나이 지방으로 연결되는 마구(馬具) 출토품이 동일 유형이라는 점이 증거였다. 에가미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이나 ‘임나일본부설’도 가공의 것으로 보았다.

기마민족설이 여기서 끝났으면 과학적 연구로 끝났을 터인데 에가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을 제기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진왕(辰王)의 후예라는 의식을 가진 숭신왕이 4세기 초 일본 열도에 건너와 기타큐슈에 수도와 본거지를 두고 한반도 가라(加羅) 지방과 기타큐슈 지방을 아우르는 왜한연합왕국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 왕국이 강성해져서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주도 세력이 됐는데 그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의 ‘왜’ 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한연합왕국설도 6가라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기타큐슈와 대등한 영토였다는 변화뿐이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다. 왜한연합왕국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기타큐슈에 걸쳐서 200년이나 존속했다면 국호라도 있었을 터인데 이를 증명할 단 한 줄의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6가라는 소국마다 고유 명칭이 있었고 임나는 그 가운데 고령지방의 소왕국이었다. 기타큐슈에 있던 나라는 변한에서 건너간 변한의 구야국의 분국으로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구야왜(狗邪倭)’라고 불리게 된 소왕국으로 6가라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된 별개의 소왕국이었다. 4세기 말∼5세기 초 구야왜가 백제와 가라가 동맹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요청에 응해 소규모의 원병을 보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강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백제군의 포로가 8000명이 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주력군은 물론 수만 명의 백제군이었고 원병인 왜군은 겨우 1000명 미만의 보조적 원병이었다. 이때 왜군은 왜한연합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기타큐슈 구야왜국의 일회성 파견 원병에 불과했으므로 광개토대왕비문이 왜한연합왕국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 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할 때 일제 어용사가들이 침략 도구로 고안한 임나일본부설을 2007년의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해 한국 침략 정신을 교육, 고취하고 일본 문부과학성이 이러한 한국 역사 왜곡을 권장 또는 독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동아일보 2007.04.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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