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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국역사 - 6. 명칭을 통해 본 독도의 주인

‘다케시마’ 성인봉 이두 표기서 유래



일본은 원래 독도를 다케시마가 아닌 마쓰시마로 부르다 1886년을 전후해 울릉도의 호칭이었던 다케시마로 은근슬쩍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05년 무단편입 때 독도 호칭 둔갑

 울릉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 몇 개의 고인돌 유적과 남성동 고인돌 덮개돌의 성혈(별자리 구멍)이 보고됐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고조선 사람들이었다. 고인돌은 고조선 특유의 무덤 양식이기 때문이다.

 한자 명칭이 시작되기 전에 순수 한국 고대어로 울릉도의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고문헌 ‘공임집(公任集)’과 ‘권기(權記)’는 울릉도의 표류민을 ‘우루마’ 사람이라 했다. 우루마가 순수한 신라말, 고려말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우루마는 무슨 뜻인가? ‘우루’는 왕(왕·王, 황·皇, 주상·主上, 성상·聖上)의 뜻이고, ‘마’는 뫼(산·山, 릉·陵, 봉·峰, 숭·嵩)의 고대어이다. 즉 ‘우루마’는 임금산, 왕검산, 성상봉의 뜻이다. 우루마는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에 병합된 뒤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분화됐다. ‘울릉(鬱陵, 蔚陵)’은 우루를 줄여 ‘울’로 하고, 마(뫼)를 ‘릉(陵)’으로 한자 의역하여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릉(于陵, 芋陵, 무릉·武陵)’은 우루의 ‘루’를 생략하고, 마를 ‘릉(陵)’으로 한자 의역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산(于山, 芋山)’은 우루의 ‘루’를 생략하고, 마(뫼)를 ‘산(山)’으로 한자 의역하여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성인봉(聖人峰)’은 ‘왕’을 중세에는 ‘성인’으로도 별칭했으므로 우루(왕)를 ‘성인’으로 한자 의역하고, 마(뫼)를 ‘봉(峰)’으로 한자 의역해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언제 독도에 우산도라는 명칭이 생겼을까? 1417∼1425년 조선 세종이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에 임명해 파견했을 때, 현재의 울릉도에는 ‘무릉(武陵)’ 또는 ‘울릉도’의 명칭이, 현재의 독도에는 ‘우산도’의 명칭이 확실하게 분화돼 붙여졌다.

 ○日, 17세기 때 竹島(울릉도)-松島(독도)라 호칭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어떻게 호칭했을까? 고 이병도 박사는 논문지도 때, 학생이 가져온 17세기 고지도에 성인봉을 弓崇(궁숭)이라 표기한 옆에 ‘イソダケ(이소다케)’라고 훈독 표기한 것을 발견했다. 궁숭(弓崇)은 ‘왕검산’의 한국식 이두 표기(왕검을 弓으로, 산을 崇으로 표기)인데, 일본인들이 이를 ‘이소다케’로 읽다가 후세 일본인들이 ‘이소다케시마(磯竹島)’로 한자 표기를 바꾸고, 다시 ‘다케시마(竹島)’로 줄여 호칭했다고 이 박사는 해석했다. 참으로 탁견이다.

 일본에서 우산도(독도)는 어떻게 호칭했을까? 일본 관습에서는 송(松)과 죽(竹)은 언제나 붙어 다니는 한쌍이다. 울릉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이 붙여지자,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우산도에는 으레 마쓰시마(松島)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7세기 때의 일이다.

 신라에 병합(서기 512년)되기 이전 우산도 사람들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영토로 해상 소왕국을 수립해 살았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우산도와 우릉도 두 섬을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칭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808년 출간된 ‘만기요람’ 군정편에서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명백히 기록했다.

 현대 일본 정부는 1960년 독도를 거론한 최초의 일본 고문헌은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라고 한국 측에 알려왔다. 이 책은 출운국(出雲國·지금의 시마네 현을 포함한 지역) 영주가 오키(隱岐) 섬에 관리를 파견해 일본의 서북 경계를 조사한 보고서이다. 그런데 ‘은주시청합기’도 독도(松島)와 울릉도(竹島)는 고려에 속하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오키 섬까지임을 명백히 했다.

 임진왜란 때 울릉도민이 왜군의 노략질을 당해 조선 정부는 쇄환정책을 강화했다. 이 틈에 일본의 2개 가문 어부가 울릉도와 그 부속섬인 독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하는 허가를 신청하자, 도쿠가와(德川) 막부 정권은 1618년에 ‘竹島 도해면허(渡海免許)’를 내어주고, 1656년에는 ‘松島 도해면허’를 내주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이것을 일본이 독도를 영유한 유일한 ‘역사적’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반대가 진실이다. 당시 막부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나갈 때의 허가장이었으므로, 도해면허를 내어주었다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닌 외국(조선) 영토임을 명증하는 것이다.

 또 하나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안용복 등 조선 어부와 일본 2개 가문의 어부가 1693년 울릉도에서 다툰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독도 영유권 논쟁이 3년간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의 항의를 받은 도쿠가와 막부의 최고집정관인 관백(關伯)은 1696년 1월 28일 지방 영주들에게 ‘竹島와 松島는 조선 영토이므로 일본인들의 출어를 엄금한다’고 명령하고 두 섬의 도해면허도 취소했다. 일본의 메이지(明治) 정권도 울릉도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예컨대 1876년 일본 근대지적도를 만들 때 시마네 현 지사의 ‘竹島, 松島를 시마네 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에, 내무성은 약 5개월간 조사한 후 두 섬은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총리대신의 최종결정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우대신(右大臣·사실상의 총리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巖倉俱視)는 이를 검토한 다음 1877년 3월 20일 공문서로서 ‘竹島와 그 외 1도(松島)는 일본과 관계없음을 심득(心得)하라’고 전국 현지사와 공무원들에게 명령했다. 이것도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자료이다.

 ○ 다케시마(竹島)가 독도 호칭으로 둔갑한 사연

 이 무렵 일본에서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學) 등이 동해에 울릉도와 독도가 아닌 큰 섬을 발견했다고 ‘松島개발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일본 해군이 큰 기대를 갖고 현지조사를 해 보니, 그 섬은 조선 울릉도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이때부터 울릉도를 공식적으로 마쓰시마(松島)로 바꿔 부르고 종래 마쓰시마로 부르던 독도를 서양 이름인 ‘리앙쿠르’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 어민들도 ‘환영수로지(환瀛水路誌)’ 제2판이 간행된 1886년경부터는 해군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을 방치하거나 보호했다.

 조선 정부는 종래 쇄환정책을 폐기하고 1882년 울릉도 독도 재개척 정책을 채택해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에 임명했다. 1883년부터 개척민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켰는데 다수가 남해안 호남 어민이었다. 그들은 울릉도 앞마당인 우산도(독도)에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이 섬을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으로 ‘독섬’이라 호칭했다. 이에 우산도는 1883년부터 울릉도 개척민들에 의해 한자 의역 표기 때는 석도(石島)라 쓰이고, 음역 표기 때는 독도(獨島)라 쓰이게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내부관리 우용정(禹用鼎)의 지휘 아래 부산항 감리서 직원 영국인 러포트 등을 울릉도에 파견해 일본인 불법 입도 실태를 조사한 후, 1900년 ‘칙령 제41호’로서 강원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鬱島郡)’으로 승격시키고, 그 행정관리 구역을 ‘울릉도, 죽도(울릉도 옆의 죽서도), 석도(독도)’로 법정하여 ‘관보’를 통해 국내외에 공포했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 국제법 체계에 따라 선언한 매우 중요한 칙령이었고 제도개혁이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후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 설치를 위한 군사 목적으로 군함 신고(新高)호를 예비조사차 울릉도에 파견했다. 신고호는 1904년 9월 25일 울릉도에서 청취조사를 통해 독도에 대해 한국인들은 ‘獨島’라고 쓰고, 일본인들은 ‘리앙쿠르’라고 부르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 몰래,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이므로 일본에 영토 편입하고 명칭을 다케시마로 의결했다. 일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른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독도 영토 편입 내각 결정은 독도가 한국이라는 소유주가 있는 ‘유주지(有主地)’였으므로 국제법상 무효의 결정에 불과했으며 명백한 침탈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894년 1월 1일 이후 일제가 약취한 모든 영토는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원칙 아래, 1946년 1월 2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로 독도를 원주인인 한국에 반환했다. 그러므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명명백백한 한국 영토이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전혀 없다.

 오늘날의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한국을 침략 강점한 1905년의 구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을 21세기에 계승하려는 침략 책동에 불과하므로 한국 국민과 정부는 일본의 침략 책동을 단호히 규탄 분쇄하고 주권의 일부인 독도 영토를 한 치의 허점도 없이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동아일보 2007.05.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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