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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100주년 - 2. 홀로 남은 이상설 “슬프다, 너무 슬프다”

  • 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에서 2번 전차를 타고 15분쯤 가면 시 외곽에 자리잡은 뉴 에이큰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닿게 된다. 이곳을 찾은 날, 수많은 비석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헤맨 끝에 관리사무소 뒤편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이준(李儁·1859~1907) 열사의 청동상을 간신히 찾았다. 그의 묘적지, 젖은 흉상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순국한 지 사흘이 지난 1907년 7월 16일, 여기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과 ‘드 용’ 호텔의 주인이 전부였다. 넋이 나간 이상설은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영어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다른 밀사인 이위종(李瑋鍾)은 잠시 러시아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만리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48세의 이준은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기까지 55년 동안 이 쓸쓸한 공동묘지 구석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이틀 뒤 서울. 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 호외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이준씨가… 충분(忠憤)한 지기(志氣)를 불승(不勝)하여… 자결하여 만국사신지전(萬國使臣之前)에 열혈(熱血)을 일쇄(一灑)하여 만국을 경동(驚動)하였다더라.” 다음 날짜 황성신문도 “이준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찔러 자결함)하였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다더라”고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게 됐던 첫 근거는 바로 이 신문들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정설은 이준 열사가 ‘분사(憤死)’ 또는 ‘순국’했다는 대단히 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 ‘할복자살이 아닌 쪽’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출판물에선 ‘자결’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혼란은 가중된다.
  • ▲ 네덜란드 헤이그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있는 이준 열사 묘적지.
  • ◆젖은 흉상엔 거미줄만 쳐저있는데…

    도대체 진상은 무엇이었나. 자결인가? 아니면 병사인가?

    헤이그 바겐(Wagen) 가(街) 124A번지. 이준이 별세한 장소인 옛 ‘드 용’ 호텔에 자리잡은 이준열사기념관에는 당시 네덜란드 당국의 사망증명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이 문서는 “한국 북청에서 태어난 기혼남 이준이 14일 저녁에 사망했다”고 썼을 뿐, 놀랍게도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당시 헤이그에 있던 일본 외교관 쓰즈키 대사가 도쿄에 보낸 17일자 보고서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이준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단독(丹毒·상처에 세균 감염된 것)에 의한 사망설과 자살설 두 가지를 모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이그의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장은 “자연사였을 리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급히 헤이그로 돌아온 이위종이 20일자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이준이 종기를 앓기는 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 여러 날 동안 아무 음식도 들지 않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단식을 통한 자살이었을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준의 전기인 ‘고종 황제의 마지막 특사’(역사공간, 2007년 1월)를 쓴 이계형 박사(국민대 연구원)는 그렇게 보고 있다.

    ◆숱한 증언, 기록, 보도… 엇갈린 추론들

    송 관장은 이준이 헤이그로 떠나기 전에 지은 시에서 이미 자살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헤이그 밀사로 한 번 떠난 뒤에/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좋은 술 붓고 울어주려나(海牙密使一去後, 誰將美酒哭靑山)….’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며 밀사들의 활동을 소상히 보도하던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티드(Stead)는 1907년 9월 3일 게재된 글에서 한국인들에게 “진정 독립을 되찾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국력을 기르라”고 충고한다. 그 ‘피’는 과연 누구의 피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서울의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는 또 다른 증거를 든다. 이상설이 주간을 맡아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권업신문(勸業新聞)은 1912년 8월 29일자와 1914년 7월 19일자에서 “이준 공이 뜨거운 피를 흘렸다”며 자살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설이 이준의 ‘자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사는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이다.

  • ▲ 헤이그 밀사들이 묵었던 드 용 호텔. 열사는 1963년까지 묘적지에 쓸쓸히 묻혀 있었다. 드 용 호텔은 교민 이기항·송창주씨가 사들여‘이준열사기념관’을 개관했다.
  • 이 이사는 또 1926년 4월 30일자로 재(在) 광둥(廣東) 일본총영사관이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일본측 기밀문서를 새로 찾아 본지에 공개했다. 이 문서는 이준이 헤이그에서 ‘할복분사(割腹憤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살’을 입증하는 다른 증거로는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1907년 7월 15일 오후 2시쯤 이상설로부터 ‘남편이 자결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국내 한 신문의 1959년 11월 23일자 보도도 있다고 이 이사는 말했다.

    ◆돌아오지 못한 밀사의 마지막 유언

    당시 이준의 죽음이라는 돌발사태에 당황한 일본이 병사설(說)을 급조해서 퍼뜨린 탓에, 병사의 원인으로 단독설, 등창설, 심장마비설 등 여러 풍문이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다수의 사람이 제각기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사인이 일치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1907년이 채 가기도 전인 12월 20일에 ‘한국정미정변사’라는 책을 서울의 일한서방에서 발행하는데, 바로 이 책에서 병사설을 본격적으로 선전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기독교인이었던 이준이 자결을 선택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또 다른 믿음이기도 하다. ‘자연사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헤이그의 송창주 관장도 한 가지가 여전히 미심쩍다고 말했다. “이준 열사가 순국한 1907년 7월 14일은 일요일이었어요. 그가 자살했다면,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데먼스트레이션(시위)입니다. 그런데 회의가 없는 일요일, 그것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비넨호프(Binnenhof) 건물 앞 광장도 아닌 호텔 골방에서 왜…?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인이 무엇이었든, 이위종은 이준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십시오… 일본이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한 밀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헤이그=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일보   2007.06.25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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