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22년 08월 15일 월요일

내용검색  

약탈당한 문화재

세계마당

우리마당

재외동포

문화재

동북공정

순국선열

상고사

역사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민족광장 > 순국선열 > 기사

 


헤이그 밀사 100주년 - 3. 러시아 황제의 ‘배신’

  
英·日과 화해 추진 러시아에 밀사는 달갑지 않은 손님들
“한국 실정 알릴 수 있게…” 애끓는 호소는 허공에 맴돌뿐

    • ▲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 지금부터 꼭 100년 전,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세 명의 ‘밀사’들은 일본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며 1만㎞가 넘는 거리를 달려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했다. 1907년 6월 그곳에서 개막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참석을 위해서였다. 세 밀사들이 모두 모인 곳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그리고 밀사들의 운명은 사실상 그곳에서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서 헤이그까지 그들의 여정을 역으로 추적한다(헤이그→상트페테르부르크→블라디보스토크).

       

      ◆황금 분수상 앞에 선 밀사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市) 에르미타주 미술관 뒤에 있는 네바 강변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드넓은 핀란드 만을 거쳐 페테르호프(Peterhof) 선착장에 닿는다. 페테르호프는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여름 궁전’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궁전 앞을 장식하는 64개의 황금색 분수상(像)에 압도당하게 된다.

      꼭 100년 전인 1907년 6월 여기를 찾은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명의 밀사들도 그랬을 것이다. 분수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높이 3.3m의 삼손상이었다. 1698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이 분수상은 거대 제국 러시아의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밀사들의 눈에는 그 힘이야말로 이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비쳤을 것이다.

    • ▲ 1907년 6월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밀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났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여름궁전 페테르호프. /유석재 기자
    • 부산에서 배를 탄 이준과 북간도에서 달려온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뒤 시베리아 열차에 오른 것은 5월 21일이었다. 일부에선 그들이 현재의 시베리아 철도 노선을 따라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하바로프스크를 경유해 지금처럼 가는 시베리아 철도 전 구간이 완공된 것은 1916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만주의 하얼빈을 지나 치타와 이르쿠츠크를 거치는 노선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타이가 숲이 막막히 펼쳐진 시베리아 벌판을 보름 동안 지나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6월 4일이었다.

      ◆마침내 세 사람은 모두 모였지만…

      역에는 두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55세의 이범진(李範晉)과 20세의 이위종이었다. 그들은 부자지간이었다. 주(駐)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은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사라지자 소환 명령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이 1907년 세 밀사를 뽑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된 인물이 이위종이었다. 7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났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은 완전히 새로 지어져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짐을 들고 분주히 오가는 여행객들 사이에서, 드디어 모두 모였다는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뜨겁게 포옹하는 세 밀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들은 전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였던 카를 베베르(Weber)에게 황제 알현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페테르호프에 갈 수 있었다.

      폭포 계단을 올라 대궁전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의자와 샹들리에, 창틀·촛대·거울까지 온통 황금빛으로 장식된 그 화려한 궁전의 위세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영화(榮華)란, 불과 10년 뒤 러시아 혁명의 불길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운명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의 패전 직후 ‘1차 혁명’으로 알려진 피의 일요일 사건과 전함 포촘킨 호의 반란을 겪은 러시아 제국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폐하께서 들어오라십니다.” 온화한 표정의 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가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폐하는 한국이 무고히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의 사절로 하여금 한국 실정을 그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하여… 그와 같이 되면 이는 참으로 짐과 우리 백성들이 감격하여 폐하의 은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밀사들은 자신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불법 침탈 행위를 세계 정부와 여론에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황제는 침착한 어조로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돕겠다는 말을 했으나 그것은 철저히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 ◆“그들과의 접촉을 자제하라!”

      황제에게 밀사들은 한 마디로 계륵(鷄肋)이었다. 옆에 배석하고 있던 외무대신이자 전 주일공사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Izvolsky)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즈볼스키를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최근 고려대 BK21한국사학교육연구단이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이즈볼스키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905년 10월 9일, 러시아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하기로 했음을 이범진에게 통고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899년 1차 평화회의를 주최했던 러시아는 당시 회의의 ‘초청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소멸됐고, 어떻게든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던 러시아의 정책에 대해 이즈볼스키는 제동을 걸었다. 그는 패전과 혁명을 겪고 있던 상황의 러시아에 안정적인 대외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적대국가였던 영국·일본과 화해하는 외교의 대전환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906년 10월 주일 러시아공사를 통해 ‘헤이그 회의에 한국의 참가가 불가능해졌다’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열강들의 체스 게임에서 한국은 이미 ‘버려진 말’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밀사들의 애끓는 호소를 접한 황제는 아주 잠시 동안이나마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다시금 결정을 뒤집어 밀사들을 도와줄 것인가? 아마도 그 짧은 갈등의 순간이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대한제국으로선 최후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황제는 이즈볼스키에게 지시했다. “넬리도프에게 서한을 보내시오.” 넬리도프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의장이자 러시아 전권대표였다.

      그 서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준 등이 헤이그에 도착하면… 접촉을 자제하라!” 훗날 러시아군의 장교가 된 이위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 혁명군의 편에 서서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가담한 것은, 이때 입은 배신의 상처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유석재 기자 ) karma@chosun.com  조선일보   2007.06.28 04:29

  •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 기업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