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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100주년 - 4. 블라디보스토크에 발이 묶이다

고종이 준 활동자금 전달 안돼… 블라디보스토크서 한달간 모금
한 집당 쌀 8가마 값 정도 건네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알례우츠카야가(街)에는 엉거주춤한 모습의 레닌 동상이 남아있다. 그 바로 건너편에 유럽 고성(古城)풍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이다. 플랫폼에는 옛 증기기관 열차와 함께 ‘시베리아 철도 9288㎞’라고 적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역사 앞은 분주하다. 사람들은 커다란 짐을 들고 바쁘게 오가고, ‘길음동’ ‘남한산성’처럼 한글로 쓰여진 행선지가 채 지워지지 않은 한국산 중고 버스들이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1907년 5월 21일, 이곳에서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卨)이 역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될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 일본 침략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려는 고종 황제의 특사였다.

      ◆“부산에 잠시 다녀오리다”

      한 달 앞서 1907년 4월 22일 서울 남대문역에선 가방 하나를 손에 든 중년 신사가 동지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준이었다. 이갑(李甲)과 안창호(安昌浩)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그날 아침 집을 나오면서 이준은 부인 이일정(李一貞) 여사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내 부산에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 터이니 며칠만 기다려 주소.” 그것이 남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 ▲ 한인 첫 정착지‘개척리’이준 열사가 1907년 4~5월 체류해 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해변의 옛 한인 정착지‘개척리’. 지금은 이 근처에 유원지가 들어섰다. /유석재 기자
    • 이준은 그날 부산에 도착해 하룻밤을 여관에서 보낸 뒤 다음 날인 23일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다. 진위(眞僞)야 어찌됐든, 20일자로 돼 있는 고종의 신임장을 품에 안고서였다. 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을까?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유럽에 도착해야 하며 러시아에서 이상설·이위종과 합류해야 했기 때문이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사회가 바로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는 통감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미리 (밀사 파견의) 계획을 세워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의회(同義會)에 통보하고 동의회는 이를 경성의 기독교청년회(상동청년회)를 통해 이상설·이준이 실행토록 했다.” 원래 고종은 1906년으로 예정됐던 만국평화회의에 측근 이용익(李容翊)을 보내려 했고 이용익은 러시아로 가 이범진과 함께 회의 참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국평화회의가 1년 연기되자 이용익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속 이 문제를 추진했다.

      정숭교 박사(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최근 열린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용익이 1907년 2월 24일 급서하자 이범진과 동의회가 새로운 대안 마련의 주체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동의회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교민 단체이자 의병 단체였으며 훗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주도한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었다. 여기에 고종으로부터 특사 파견의 밀명을 받은 뒤 북간도에서 민족 교육을 벌이던 이상설, 그리고 서울의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시 특사 파견이 논의되자 스스로 지원하고 나선 이준이 손을 잡은 것이다. 이들이 만난 곳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왜 한 달이나 지체했을까

      블라디보스토크의 스파르치브나야 해변은 여름이면 밤낮으로 사람들이 북적이는 유명한 유원지다. 그곳에서 한 구역 떨어진 파그라치나야가(街)는 바로 연해주에서 한인 최초의 정착 마을이었던 ‘개척리’가 있었던 곳이다. 1893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한인들은 우선 바닷가 어촌이었던 이곳에 정착했다. 3~4층 낡은 건물들이 아직도 여러 채 남아 있는 이곳은 창문 간간이 한국산 에어컨이 붙어있을 뿐 한인들의 옛 자취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때의 한인들은 모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기 때문이다. 이준은 이곳에 있던 한인 부호 김학만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 헤이그 밀사들의 기나긴 여정에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연해주에서의 체류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황급히 부산항을 출발했던 이준은 4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무려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북간도에 가 있던 이상설이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왜 그랬을까? 이들이 현지의 한인 교포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했다는 사실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기차표를 살 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고종 황제는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명의 특사에게 활동자금으로 20만원(쌀 8만 가마 값)을 건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때까지는 이 돈이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

      블라디보스토크 주립박물관 근처 스베트란스카야 14번지에는 5층짜리 옛 건물이 남아있다. 1899년부터 1913년까지 러시아 중국 은행이 있던 곳이다. 바로 이 은행에 이용익은 1904년 고종으로부터 받은 자금 30만원을 예치했음이 최근 박종효 러시아 모스크바대 객원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이용익은 “나와 고종 황제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돈을 주지 마라”고 당부했지만 은행측의 실수로 1908년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가 7만원을 인출해 갔고, 나머지 23만원은 1909년까지도 남아 있었다. 이종호가 이준에게 2만원을 줬다는 설도 있지만, 적어도 이 30만원 중에 밀사들에게 건네진 돈은 한 푼도 없었던 듯하다.

    • 이준과 이상설이 받은 의연금은 모두 2만원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모두 994호(戶)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 한 집당 쌀 8가마 값을 이들의 헤이그행(行)에 희사한 셈이다. 이준과 이상설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기 전날인 5월 20일, 한인 동포들은 이들을 위한 전별연을 열고 모금한 돈을 전달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이준은 이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 바람이 쓸쓸하고 물도 바뀌어 차가운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秋風蕭蕭兮 易水寒, 壯士一去兮 不復還).”

      최근 이 시를 접한 기자는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기시감(旣視感)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준 열사가 지은 시가 아니라, 맨 앞의 ‘추(秋)’자만 빼면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떠나기 전에 지은 시였다. 따라서 ‘물도 바뀌어’란 부분의 기존 해석은 ‘역수(易水)’라는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칼을 지니고 헤이그로 떠난다는 얘기였을까? 그는 그 칼로 과연 누구를 찌르려 했던 것일까?

    블라디보스토크=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일보: 2007.07.02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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