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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100주년 - 5. 헤이그, 마지막 20일

만국 평화회의 의장 면담조차 못해 각국 기자들 모아놓고 ‘만행’ 고발
로이터통신 특사활동 상세히 보도… 日의 로비인지 ‘비난 기사’ 삭제되고
‘고종의 분신’ 헐버트마저 사라져

  • 네덜란드 헤이그의 관광지 ‘비넨호프’ 한가운데, 지금은 상원 의사당이 된 ‘기사의 저택(Ridderzaal)’이 있다.

    작년 국내에서 출간된 가이드북조차 이 건물이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장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세 특사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이 끝내 그 문을 열지 못했던 통한(痛恨)의 장소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 대만 단체 관광객들이 그 앞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즐겁게 웃으며 사진 찍기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특사들이 도착한 1907년 6월 25일부터 이준이 순국한 7월 14일까지, 20일 동안 그 도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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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의장 문은 굳게 닫히고…

    헤이그 HS역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바로 숙소 드 용 호텔 현관에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밀사’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특사’였다.

    일본은 경악했다. 그들이 특사로 파악했던 인물은 고종의 측근 호머 헐버트(Hulbert)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준과 비슷한 시기 서울을 출발해 미리 유럽에 도착, 배후에서 특사들의 활동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특사가 누구든, 그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새로운 ‘조약’을 강요하려는 것이 그의 시나리오였다.

    • ▲ 네덜란드 헤이그시 이준열사기념관의‘이준 방’.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한 드 용 호텔의 객실이다. 지금은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유석재 기자

     

  • 헤이그의 특사들이 스스로 국제적 미아(迷兒)가 됐음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본국 러시아의 지령을 받은 만국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는 면담조차 거절했다. 일본은 집요하게 이들의 활동을 방해했다. 특사들은 일본의 불법 행위를 밝힌 ‘공고사(控告詞)’를 배포하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대표들을 찾아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은 제2차 영·일 동맹으로 사실상 한국을 일본에 넘겨 준 상태였다.

    하지만 특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레이덴대의 쿤 드 취스테르 교수는 “그들은 여론을 잘 활용했고, 국제법에 대한 이해도 밝았다”고 평가한다.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던 영국인 윌리엄 스티드(Stead)를 비롯한 각국 기자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특사들의 활동 상황을 세계로 전파했다.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약관의 이위종은 훌륭한 인터뷰와 연설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닫힌 회의장 문 앞 광장에서 “1905년의 조약(을사늑약)은 아무 효력도 없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 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는 또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神)이란 유령일 뿐이다”며 만국평화회의의 위선과 허구를 통렬히 비판했다.

    ◆“기관총 앞에는 평화가 없어”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街) 6·7번지가 나온다. 그곳에 남아있는 3층짜리 옛 건물이, 7월 9일 이위종이 각국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던 국제기자클럽이다.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한국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이위종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이 만장의 박수로 의결됐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여기서부터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스티드가 돌연 “네덜란드가 한국의 회의 참석을 거부한 것은 올바른 일”이라 말하더니 결의안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의 소신인지 일본측 로비의 결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티드는 1912년 4월 저 유명한 타이타닉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다 사망했고, 회고록도 남아 있지 않다.

    좀더 심각한 일은 그 다음날인 7월 10일에 일어났다. 고종의 ‘분신’과도 같았던 헐버트가 신교도 회의 참석을 이유로 영국으로 떠남으로써 헤이그에서의 활동을 접은 것이다. 헐버트가 17일 헤이그로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지만 믿을 수 없다. 그는 19일 미국 뉴욕에 도착해 언론과 인터뷰를 갖게 되는데, 당시 대서양을 이틀 만에 건널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없었기 때문이다.

    • ▲ 1면 전면을 털어서 헤이그 밀사들의 활동을 크게 보도한 1907년 7월 5일자‘만국평화회의보’. 사진에서 정사(正使)인 이상설은 앉아 있고 부사(副使)인 이준(왼쪽)과 이위종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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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의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장은 “헐버트가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된 것은 단 한 번”이라며 그 자료를 보여 줬다. 그가 런던으로 가기 직전 한국 특사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특사들의 신분이 노출된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쩌면 당시 퇴위 압력을 받던 고종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 등을 돌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준 일행은 마지막까지 여인숙 수준인 드 용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위종이 그 중요한 시기에 잠시 러시아로 돌아간 것도 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하사했다는 활동자금 20만원은 어디로 간 것일까? 특사들이 그 돈을 받았든, 그 중 일부만 받았든,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인 안락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버려졌다

    7월 14일 저녁 7시, 이준은 드 용 호텔의 초라한 객실에 누워 있었다. 아직 대낮처럼 밝은 네덜란드의 여름 저녁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때마침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어서 각국 대표들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만국평화회의는 폐회까지 아직 석 달 이상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넉 달 전 법부대신 탄핵 사건으로 태형 70대의 처벌을 받은 데다 1만㎞가 넘는 여행 끝에 실의와 분노로 건강을 잃은 48세의 이준은, 며칠째 곡기마저 끊은 상태였다.

    자살인지 아닌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들이 철저히 버려졌다는 점이 기억돼야 할 것이다. 이제 러시아도, 열강 대표들도, 스티드도, 헐버트도, 그리고 고종 황제조차 그들을 돕지 않았다. 그들을 파견했던 대한제국은 곧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 교사형(絞死刑),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할 것이었다. 이준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술잔을 깨는 소리와 웃음소리,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유’가 창문 앞 바겐가(街)까지 들려 왔을 것이다. 이준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조국을 도와주소서!

    이상설이 부둥켜 안았을 때 이준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이준의 관을 살 돈조차 없었던 이상설은 두 달 뒤인 9월 6일에야 이위종과 함께 다시 헤이그로 와 102달러 75센트를 주고 정식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헤이그=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일보   2007.07.0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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