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22년 09월 27일 화요일

내용검색  

약탈당한 문화재

세계마당

우리마당

재외동포

문화재

동북공정

순국선열

상고사

역사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민족광장 > 문화재 > 기사

 


완벽한 백제의 예술혼 1400년만에 ‘빛’ 보다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부여 왕흥사지(사적 427호)에서 발굴된 금은동 사리기를 비롯한 사리장엄구 등을 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감격에 겨운 듯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이후 최대 발굴성과”라고 극찬했다.

◇금·은·동 사리기

우선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1990년대 중반 능사에서 사리석감이 왔지만 사리기는 없었다”고 전했다. 특히 석함으로 만들어진 사리공(16×12×16㎝) 안에 청동제 사리함(높이 10.3㎝)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은제 사리병(외병·6.6×4.4㎝)이, 또 그 은제 사리병 속에 받침대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금제사리병(내병·4.6×1.5㎝)이 계속 나왔다.

김과장은 “석함까지 하면 돌-청동-은-금 등이 4중으로 중첩된 완벽한 사리기의 출토”라고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사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금·은 사리병엔 맑고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과연 1400년 이상 버텨왔을지 모르는 그 액체는 무엇일까. 유홍준 청장은 “사리가 녹아 액체로 변한 것인지, 결로현상 때문에 빚어진 것인지 성분 분석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제 사리병은 순금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규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원래 금의 비중값은 19인데 출토된 금제 사리병의 비중은 18”이라면서 “순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당혹감과 연구 과제를 안겨준 ‘명문’

또 하나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는 청동제 사리함에 새긴 명문이다. 노중국 교수는 “기록이 부족한 우리 고대사 연구에 명문 발견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명문에 나오는 ‘창(昌)’은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년)을, ‘정유년 2월’은 577년 2월을 각각 지칭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왕흥사는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됐다”고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새 명문은 왕흥사의 실제축조연대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려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또하나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일본 쇼도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말고도 577년 사망한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노교수는 “고대사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23년의 차이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원래 왕흥사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사망한 뒤 신하들에게 넘어간 권력을 되찾기 위해, 즉 왕권의 흥융을 위해 창건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는 것.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오아 창이 절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왕충사의 축조 연대가 서기 577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번 명문 발견으로 왕흥사는 위덕왕이 왕권쟁취 등의 목적이 아니라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한 이른 원찰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노교수는 “결국 위덕왕은 능사(567년)는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해, 그리고 왕흥사는 죽은 아들을 위해 각각 지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남는 수수께끼는 명문에 따르면 사리병에 넣은 2매의 사리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점. 유청장은 “사리기와 사리병을 열 때 쉽게 열리지 않았을 정도로 도굴 흔적은 없었다”면서 “사리가 물로 변했는지, 혹은 처음부터 넣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진단구 및 어도

전문가들은 진단구(탑, 건물을 지을 때 붕괴방지와 액막이용으로 넣는 장신구 등 생활용구)의 화려함에 넋을 잃었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출토됐다.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곡옥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 옥류,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이 보였다. 또한 철도자(칼), 운모로 만든 연꽃은 물론, 중국 남북조시대인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된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들이 확인됐다.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강순형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장은 “특히 1㎜도 되지 않게 깎아 투명한 운모로 연꽃 모양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금박을 입힌 형태는 처음 확인되며, 그 수법이 너무도 정교하다”고 감탄했다. 또한 화석화한 목탄에 금을 두른 탄목금구는 무령왕릉 출토품과 같다. 유리와 옥을 직경 5㎜도 되지 않은 알갱이로 만든 목걸이, 팔찌 등과 호랑이를 형상화한 목걸이 등은 걸작 중 걸작으로 꼽힌다. 대부분은 실생활에 사용된 것들을 그대로 묻었다.


황흥사지 심초석 남쪽에서 출토된 진단구들

유홍준 청장은 “당대 중국은 수나라 통일(589년) 전의 북제·북주시대인 과도기였고, 유럽은 중세 이전의 암흑시기였다”면서 “따라서 이번 유물들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라고 단언했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왕이 백마강을 통해 행차, 배를 대고 왕흥사에 들어온 것을 알려주는 어도(御道·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도 확인됐다.

〈부여|이기환 선임기자〉 경향신문  2007년 10월 24일 18:03:23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 기업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