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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한테 박대당하는 한글

해마다 되풀이되는 동어반복이지만 올해도 한글날을 맞아 우리 사회 도처에서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예찬을 했다. 유네스코가 세종대왕상을 제정하고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한국어를 국제특허 협력조약의 국제 공용어로 채택했다는 언급을 필두로 한글이 중국의 한자나 일본의 가나보다 컴퓨터 입력속도가 7배나 빨라 IT 강국의 원동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글꼴의 개발로 머잖아 1인 1글꼴 시대가 도래할 거라는 장밋빛 예상이 한글의 현재 위상을 눈부시게 분장한 셈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한글 대신 이 나라에 1급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는 영어교육 광풍을 개탄하는 언성이 높았다. 공교육 와해, 사교육 시장의 공룡화, 조기 영어교육 열풍, 대학 캠퍼스의 영어 광풍, 지자체의 우후죽순식 영어마을 운영과 추진 실태 등등에 대해 한껏 고조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와 같은 지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불감증의 강도는 ‘소귀에 경 읽기’ 수준을 넘어 ‘너는 한국말로 떠들어라. 나는 영어로 말할 것이다’라는 식의 감감한 무반응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한글로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 혹은 우리말이라고 하고 나머지 언어를 통틀어 외국어라고 부른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영어는 당연히 외국어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분류가 아니라 민족적 특성과 차이를 내포하는 본질적 분류이다. 좀더 깊게 말하자면 언어에 의해 사고도 달라지는 것이다. 영어는 주어 뒤에 바로 동사를 수반하는 동사구조를 지녔지만 우리말은 동사를 가장 뒤에 놓는다. 영어식 사고가 행동을 중시하고 우선하는 반면 우리말은 내가 무엇에 대해 행동할 것인지 그 대상을 먼저 앞세우고 중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외견상의 차이 같지만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국민성과 가치관, 나아가 철학적 입장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작금 우리 사회가 우리말에서 우러난 사고양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영어식의 행동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면 과장된 언급이라고 할까.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방송, 강단, 종교적 설교, 심지어 대통령의 회견에서도 부적절한 표현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을 때가 많다. 서울은 ‘하이 서울’이고 수원은 ‘해피 수원’이고 한국은 ‘다이내믹 코리아’이니 우리말이 제대로 구사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겠다. 도대체 국가적 정체성의 기반을 모조리 영어에 헌납한 뒤에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말은 우리말의 주인들로부터 학대당하고 혹사당하고 멸시당하고 있다. 한글의 특성을 간파하고 그 소리와 사유와 운율을 구사하기에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한심한 채팅 잡담에서 뭉개버리고, 비틀어버리고, 아예 글꼴을 망가뜨리는지 모를 일이다.

제 집에서 문전박대당하고, 제 집에서 쫓겨난 한글들의 신음이 이 밤에도 네온사인 명멸하는 국적불명의 도시를 배회하고 있지만 제 집으로 돌아가 한글의 이름으로 눌러앉을 만한 빈틈은 여전히 없다. 한글의 주인들이시여, 우리말의 소유주들이시여, 그대가 사는 아파트 이름은 무엇이며 그대가 타는 자동차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대가 입고 있는 옷의 이름은 무엇인가.

박상우<소설가> 경향신문 2007년 10월 17일 17: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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