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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강제 이주 70주년 <중> - 우리는 한인

어른 앞에선 고개 돌려 술 마시고 하루 한 끼는 한식

 

 

 

 

 

 

  

 

 ◀ 고려인(러시아 거주 한인) 강제 이주 70주년을 맞아 이주 1~2세대와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 등 109명이 25일 강원도 속초항으로 입국했다. 방문객들 중엔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알라 김(67)씨도 있다. 김씨가 홍 장군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받고 찍은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지난달 13일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400여㎞ 떨어진 인구 3만 명의 소도시 우슈토베. 1937년 연해주 등지에서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곳이다. 지금도 5000명이 넘는 이주민 후손이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한인'=피와 눈물로 점철된 7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현지 고려인은 '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현지 풍속과 뒤섞여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우리 문화의 원형은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대다수 고려인은 지금도 어른들 앞에선 담배를 피우지 않고, 고개를 둘려 술을 마시는 예절을 깍듯이 지킨다. 이들은 하루 한 끼 이상을 한국 음식으로 먹고 있다. 쌀밥에 시래기 된장국(현지 말로 시래기 장물이).김치(짐치).콩나물(절구미), 그리고 고사리 나물 같은 반찬이 식탁에 오른다.

추석과 설 등 전통 명절도 지켜오고 있다. 특히 우리에겐 이미 사라져가는 명절인 한식을 크게 쇤다. 한식(양력 4월 5일) 때면 온 가족이 고기와 생선.인절미(현지 말로 짤떡이).과일.사탕과 초콜릿 등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해 성묘를 간다. 고려인이 '북망산'이라 부르는 공동묘지가 가장 붐비는 날이다.

◆한국어 신문과 공연 유지 노력=우리글과 예술혼을 지키려는 노력도 눈물겹다. 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방가르드(선봉)'란 이름으로 창간됐던 우리말 신문이 지금도 알마티에서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되고 있다. 주간신문으로 매주 금요일 3000부를 인쇄하는 이 신문은 전체 16개 면 중 12개 면을 러시아어, 4개 면을 우리 말 기사로 채우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2년 설립됐던 음악.연극 극장인 고려극장도 우여곡절 끝에 알마티로 옮겨온 뒤 지금까지 춘향전.심청전 등의 우리말 공연을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민족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고려극장의 조야 김(56.여) 부극장장은 "우리말과 노래에 능숙한 배우나 가수가 갈수록 줄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고난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성=1860년대부터 연해주로 옮겨가 살던 약 20만 명의 한인은 37년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한인들이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 때문이었다. 그해 9월부터 10월 사이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 강제 이주가 진행됐다. 저항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과 군인 등 2800여 명은 사전에 체포돼 살해됐다. 한인들은 출발 하루 이틀 전에 이주 통보를 받고 가축 운반용 차량이나 화물차를 개조한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한 달 넘게 이동해야 했다.

우슈토베에서 만난 이주 1세대 안보배(84)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며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찌푸렸다. 안씨는 당시 14세의 나이로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다 우슈토베로 끌려 왔다.

그는 "하루 전에야 이주 통보를 받고 먹을 것과 살림살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열차에 올랐다"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차량에 우리 가족 9명을 포함해 50명 정도가 탔는데 안에는 물은 고사하고 화장실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죽어 나갔다. 시신은 열차가 멈춰 설 때 철로변에 묻거나 그마저 힘들 땐 달리는 기차에서 밖으로 내던져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정착지에서의 삶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황무지에 내팽개쳐지다시피 한 이주민들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 토굴을 파고 생활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안씨는 "당시 '그 집에 누구 안 돌아갔소'라는 말이 아침 인사가 될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고려인의 집념은 무서웠다. 살아남은 이주민들은 이듬해 봄 황무지 개간에 나섰다. 맨손과 삽으로 수로를 파 인근 강에서 물을 끌어다 벼농사도 짓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이 만든 콜호스(집단농장)의 수확량은 언제나 생산 계획을 몇 배나 앞질렀다. 한민족 특유의 근면성에 현지인들도 혀를 내둘렀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이들은 한인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알마티.우슈토베(카자흐스탄)=유철종 기자  [cjyou@joongang.co.kr]    중앙일보 2007.10.2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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