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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 (9) - 뉴허량의 적석총들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적석총), 그리고 옥기(玉器). 흔히 집과 금속, 문자를 문명의 3요소라 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 깊은 제단과 신전, 무덤은 이 3요소를 초월한다. 또한 옥기는 계급·사회분화, 그리고 제정일치 사회의 상징물이다. 바로 발해문명의 뼈대가 된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빛나는 창조물들이다.

 
   ▲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제2지점에 있는 계단식 적석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지점은 제단과 적석총, 그리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적석유구 등으로 구성됐다. 뉴허량/김문석기자 

지난 7월30일 탐사단은 바로 그 훙산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을 찾았다. 이제 훙산문화의 정수인 돌무덤과 제단·신전, 그리고 옥 문화 등을 차근차근 탐구할 참이다. 오전 9시20분 탐사단을 태운 버스가 닿은 곳은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소 뉴허량 공작참(站)이다.
 
 

-30년 연구의 내공-

“(공작참) 관리소장이 회의를 하고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네요. 우선 (유물 진열실로) 들어갑시다.”

주인(소장)이 없다는 데도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진열실로 안내한다. 신동호 탐사단장과 기자는 요 며칠간 입이 떡 벌어졌다. 이형구 교수의 전화 한 통화와 얼굴이 바로 명함 같았다. 예컨대 훙산문화 발굴을 총 지휘하는 츠펑대 훙산문화 연구중심의 유물수장고는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곳. 자국의 연구자들에게도 출입을 쉽게 허용하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 덕분에 수장고 안에 켜켜이 진열된 수많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의 유물들을 원없이 보고, 촬영할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빗살무늬·덧띠토기를 비롯한 눈부신 유물들. 그뿐이랴. 차하이·우한치 박물관과 나중에 보게 될 선양박물관에서도 바로 이교수의 ‘얼굴 명함’ 덕분에 수많은 사진·영상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날도 같았다. 뉴허량 발굴 유물들을 마치 현장 책임자처럼 설명해주는 이교수의 30년 내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30년 이상 중국 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끊임없이 학술토론을 벌여나간 결과겠지요. 연구 축적 없이 대증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욕하는 것으로는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감정적으로만 대응하게 되면 (중국인들이) 문만 걸어 잠그게 되고…. 우리는 또 접근할 수 없고….”(이교수)

-내친김에 부산까지-

뉴허량 유적은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建平)과 링위안(능원·凌源)의 경계선에 걸쳐 있다. 1940년 역사교사 둥주천(동주신·冬柱臣)이 채색토기를 발견했고, 1979년 역시 이곳 영역내인 싼관뎬쯔(三官甸子)에서 옥기묘를 발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본격 발굴된 것은 1983년이었다. 쑨서우다오(손수도·孫守道)와 함께 발굴을 주도한 궈다순(郭大順)의 회고.

“지난 100년 동안 500여곳의 훙산문화 유적을 발견했는데, 무덤이 확인된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뉴허량 유적이 하나하나 벗겨질 때마다 학계가 경악했어요. 적석총과 제단, 신전은 물론 다량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죠. 그리고 한 변이 100m에 달하는 수수께끼의 금자탑(피라미드)까지…. 발굴단은 모두 20여곳의 유적을 확인했고, 16개 지점에 대한 번호를 매겼어요. 확인된 유적의 면적은 무려 50㎢에 달했고….”
 
   ▲ 1992년에 확인된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아직 정식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탐사단의 이날 목표는 제2지점(적석총+제단+옥기)과 1지점(여신묘), 13지점(대형 피라미드)이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적석총과 제단, 옥기가 나온 뉴허량에서 가장 유명한 2지점이다. 철장으로 둘러싸인 유적 안에는 감시 초소가 있는데, 이교수가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니 금방 문을 연다.

발굴이 끝나 파릇파릇한 풀 사이로 나타난 것은 온통 돌무더기였다.

“유적의 이편 저편에는 베이징~단둥으로 향하는 도로와 철도가 지나고 있어요. 이 도로와 철도는 의주를 거쳐 한반도 끝인 부산까지 닿을 수 있지요.”

이교수의 말이 기자의 가슴 벅찬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옛날 돌무덤을 썼던 우리의 선조들 가운데 일부가 이 바로 이곳에서 랴오허(遼河)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남으로 남으로 향해 한반도 저 끝, 부산까지 닿지 않았을까.

-1인 독존의 사회-

“이기자, 이리로 와봐요.”

이형구 교수가 바삐 손을 잡아 끈다. 뉴허량 16개 지점 가운데 13곳이 적석총으로 조성됐다. 그 가운데 이곳(2지점)의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들어가자마자 가운데 조성된 적석총은 남북 18.7m×동서 17.5m의 방형으로 조성됐는데, 3층으로 된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 안에는 석곽을 놓았고, 그 안에 석관을 조성했다. 석관 안에서는 성인 남성의 인골과 홍산문화 옥(玉)의 대표격인 용 모양의 구부러진 옥이 확인되었다.

대형 적석총은 양 옆으로 원형 제단과 거대한 적석유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의 전통은 훗날 고구려·백제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 뉴허량 2지점 항공사진. 

또한 제단과 관련한 이야기는 후술하겠고, 여기에서 언급할 것은 적석유구이다. 이 돌로 쌓은 유구 안에는 무려 26기의 크고 작은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큰 석관은 길이 2m, 높이 60㎝를 넘고, 작은 석관은 길이 55㎝ 정도인 것도 있다. 순장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상(은)나라와 부여의 풍습으로 이어지는 장례 풍습이다. 그리고 적석유구 속에 석관묘를 밀집시켜 조성한 것은 한반도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과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과 비슷하다.

이 유적의 모티브는 뻔하다. 가운데 중심대묘, 즉 대규모 적석총은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이 분명하며, 적석유구 속에 조성된 26기의 무덤은 씨족사회의 구성원들이 계급별로 묻힌 것이다. 그리고 제단은 그들이 지모신과 조상신을 모신 증거이다. 중국 학계는 3단 계단식 적석총의 위용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는 훙산문화 사회는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사회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훙산문화처럼 계급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사시대 유적은 없어요. 이미 단순한 씨족사회를 넘어선 고국(古國)의 단계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출했어요.”

이교수는 “더 봐야 할 게 있다”면서 다시 기자 일행의 소매를 끌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동방의 피라미드요?”

“가보면 압니다.”

잠깐 길을 잃었다가 뉴허량에서 1㎞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좐산쯔(전산자·轉山子)라는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 낮은 나무가 서있는 아주 낮은 구릉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즉 중국말로 진쯔타(金字塔), 즉 금자탑이란다. 이집트의 웅장한 피라미드와 비교한다면 ‘피식’거릴지 몰라도 중국학계의 자부심은 대단하단다.

“그럴 만도 하죠.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앞선 시기의 피라미드니까요.”

기자는 속으로 중국인들 특유의 ‘뻥’인가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계단식 적석총을 흔히 피라미드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라 일컫는다. 그보다도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범상치 않은 모양이다.

“한변이 100m나 되는 거대한 층급형 피라미드예요. 지금 확인되는 것은 7층까지랍니다.”

이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판축의 형태로 흙을 다지고(층마다 8~10㎝로) 바깥 쪽은 돌로 쌓았어요. 다진 할석의 면을 바깥으로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견치석과 엇박자로 쌓는 석축의 방법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부여~고구려·백제·신라~일본 규슈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적석총과 같은 모티브라는 것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조성된 앞에 제단(60×40m)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훙산문화 사람들이 이 제단에서 피라미드의 주인공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피라미드는 1992년 본격적으로 확인됐다. 아직도 표면만 발굴했을 뿐 중앙부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중국인들이 이 수수께끼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라미드라 일컫는 이런 거대한 적석총의 존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BC 2612년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그런데 이 동방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교수는 “모티브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다”면서 “이 건축물은 제단을 갖춘 무덤이며 그리스 신전 같은 역할을 했으니 훙산문화가 다른 세계문명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동기 문화는 동이가 창조했다?-

 또 하나, 이 피라미드에서는 청동기를 제조할 때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청동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됐다.

이를 두고 중국의 저명한 야금학자는 “기존 중국의 청동기 시작 연대(BC 2000년설)보다 1000년 이상 앞선 BC 3500~BC 3000년 사이에 이미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해왔다. 아직은 그의 견해가 세계학계에서 공인되지 않고 있다. 만약 공인된다면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가 창조됐다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무엇보다 이곳은 동이의 영역 아닌가.

중국학계는 입이 딱 벌어졌다. 중국 고고학자 옌원밍(엄문명·嚴文明)은 “이 피라미드는 왕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화문명 5000년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피라미드는 어떻게 다링허와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반도와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로 퍼졌을까. 고구려 지안(集安) 국내성 일대에서 발견된 1만여기의 적석총은 이 뉴허량 적석총과 어떤 친연관계를 갖고 있을까. 기자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여행을 떠나보련다.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경향신문  2007년 11월 30일 15: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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