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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3) - 훙산인의 어머니

“이제 우리 여신(女神)님 보러 가야지.”

7월30일.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적석총 및 제단(제2지점)을 탐사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농을 건다. 여신묘(뉴허량 제1지점)를 ‘친견’할 시간이다. 유적 바로 곁을 지나는 베이징~차오양 간 공도(公道)를 무단횡단해서 북쪽 산길로 향했다. 여신묘로 향하는 길은 몸단장이 한창이다. 길가엔 도로용 석재들이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 석재를 깔아 길을 만들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 위해

“중국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사전작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중국 정부가 발해문명의 꽃을 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 20분 정도 산길을 걸으니 저편 숲 속에 허름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건물 한 채 한쪽에는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열심히 숫돌을 갈면서 이방인의 방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신묘를 보호하는 다른 가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다른 방문객 같으면 콧방귀도 안뀔 관리인이지만 ‘얼굴이 명함’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뭐라 한 마디하자 군말 없이 문을 따준다. 철커덕!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자마자 기자는 어두컴컴한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훌쩍 뛰어넘은 듯했다. 5000여년 전 여신의 세계로….

동방의 비너스

“왜, 중국에는 선사시대 인물조각상이 없을까.”

◀ 동방의 여신상이 출토된 뉴허량 제1지점 여신묘. 여신상과 함께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와 곰(熊)뼈 등이 출토되어 우리 민족과 강한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뉴허량/김문석기자 


3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학계가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의문점이었다. 서양에서는 찬란한 인물 조각 예술이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에서는 비너스와 같은 조각품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의 인체 조각 예술은 모두 외래 요소만을 담은 것일까.

그런데 1979년 중국학계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화(奇貨)’가 발견됐다.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랴오닝성 카줘(喀左)현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드디어 인체조각상 조각편을 발견한 것이다. 유적의 남쪽은 원형, 북쪽은 방형이었으며 양날개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확인된 유물들은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채도통형관(밑이 없는 토기)과 삼족소배(三足小杯·세발 달린 작은 잔) 등이었다.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용기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원형 석축지에서 나온 인물조각상과 임신부 모습의 소조상이다. 두 점의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은 머리부분과 왼쪽 어깨가 이미 없어진 채 발견됐지만, 다리는 남아있었고, 몸의 형태는 확실했다. 하나는 잔존 높이가 7.9㎝였고 몸은 긴 편이었으며, 나머지 한 점은 잔존 높이가 5.8㎝였고 좀 뚱뚱했다.
 

      ▲ 발굴직후 속살을 드러낸 여신묘 조사현장. 

이 임신부 인형 말고도 다른 인체 조각상이 확인되었는데, 인체의 상부와 대퇴부 등의 남아 있는 높이는 18㎝, 두께는 22㎝였다. 남은 조각들을 끼워맞추니 실제 사람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잉부상은 나체였으며, 비록 목 부분은 없어졌지만 당대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웅변해주었다. 소조 수법이라든지 손과 발 등 세부의 처리가 간단하지만 형체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인체 비례가 완벽하다.

“굉장히 육감적이죠. 소아시아에서 출토된 소형 임신부상은 여성적인 특징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추상화했는데, 둥산쭈이 출토 잉부(孕婦)상은 사실성이 강한 작품입니다.”(이형구 교수)

 

◀ 뉴허량에서 가까운 둥산쭈이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 동방의 비너스라 일컬어진다. 


학자들은 “중국의 비너스(維納斯)”라고 치켜세웠다. 중국학계는 “훙산시대는 문화교류가 빈번했고, 사회가 격렬한 변혁기였다”면서 “잉부상은 모계사회 출현의 단적인 예이며, 5000년 전 원시문명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둥산쭈이 유적연대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지금부터 5485±110년이었다.

4년 뒤인 1983년 7월, 내로라하는 중국 학자들이 차오양(朝陽)에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둥산쭈이 조사 성과에 대한 모종의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둥산쭈이가 중국 최초의 제사유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이곳에서 불에 탄 흙(홍소토)의 잔존덩어리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神)이 살았던 곳이라는 추정도 함께 했고….”

동방의 여신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년3개월 뒤인 1984년 10월31일 오전. 둥산쭈이에서 멀지 않은 뉴허량 제1지점에서 5500~5000년 전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의 일원이었던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보듯 당시의 벅찬 감격을 풀어헤친다.

“뉴허량 유적(제1지점) 발굴 현장은 폭풍전야 같았다. 발굴단의 꽃삽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모두 발굴이 이어질수록 ‘뭔가 큰 것이 걸리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에 휩싸여 입을 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주실(主室)의 서측, 바로 그곳에서 중국고고학사에 빛나는 발견이 일어난 것이다.

 
뉴허량에서 확인된 동방의 여신.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의 원형은 아닐까.  ▶


“한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기서 사람 머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살살 지워보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마와 눈이 노출되었다.”

마침내 여신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일순 사람들이 쏟아져오고, 촬영기사가 미친 듯 그 발굴 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50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이 마침내 부끄러운 듯 기지개를 켠 것이다. 머리상의 잔존 크기는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였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태였어요. 왼쪽 귀를 뚫은 흔적이 있고, 입술엔 붉은 칠(朱漆)이 남아있고, 가슴과 궁둥이, 팔, 다리 등을 조합해보니….”(이형구 교수)

귀가 작고 섬세하며 얼굴 표면이 둥근데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머리 위에 테를 두른 모습하고는…. 조각기법 또한 빼어났다. 가장 어렵다는 원조(圓雕)기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장인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작은 크게 4단계를 거쳤다. 먼저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풀 같은 식물로 둘러싸맸다. 둘째, 재료는 깨끗하고 치밀하며 점성이 크고 붉은 진흙을 사용했으며, 셋째 조형단계는 처음엔 거친 흙을 골조 위에 붙인 뒤 광택을 냈다. 그림을 그리고 상감하는 작업은 돌출 부위를 강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을 청록색 보석으로 박아놓았다는 게 특이했다. 문제는 여신의 인종을 확정하는 것. 학계는 여러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몽골 인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굴이 방원(方圓)형의 형태로 납작하고 광대뼈가 나왔고, 눈은 비스듬히 섰고, 콧잔등은 낮고 짧고, 콧날과 콧날개는 원두형(圓頭型)이고…. 전형적인 몽골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오해 한가지. 몽골 인종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몽골 인종이라 함은 지금의 몽골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인종학상으로 몽골 인종(Mongoloid)란 말은 마르코폴로가 1271~1295년 사이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간 뒤 구술한 ‘동방견문록’에서 처음 나왔다. 마르코폴로는 그때 황인종, 즉 동양의 모든 인종을 몽골 인종이라 했다. 지금의 몽골인을 콕 찍어 지칭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뉴허량 여신은 한 분이 아니었다. 여신의 머리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도 67점의 진흙조각편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은 당시 대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먼저 주실의 중앙에서 확인된 코의 잔해와 큰 귀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여신의 크기는 사람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서측실의 손목과 다리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2배 크기였으며, 주실에서 발견된 어깨, 유방, 왼쪽 손등을 검토하니 등신대의 형태였다.

그런 가운데 바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여신의 머리상이 출토되면서 등신대의 여신이 어느 정도 조립된 것이다. 결국 이 여신묘에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라는 최소한 세 사람의 여신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3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흩어진 잔해로 봐서는 더 많은 여신들을 모셨을 수 있다. 이것은 여신도 최소한 3개 등급,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다.

중앙부의 여신(사람 크기 3배)은 주신(主神)이며, 다른 여신들(사람 크기의 2배, 등신대, 그리고 나머지)은 그 주신을 모시는 군신(群神)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웅녀의 환생?

여신묘에서는 여신상 말고도 제사유적임을 나타내는 다른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유적의 총 규모는 총 4만㎡에 이른다. 특히 여신묘 주변에 있는 저장용 구덩이에서는 지(之)자문 빗살무늬토기 통형관(밑 없는 토기)과 소구관(小口罐·입이 작은 토기), 주발 등 다양한 토기와 사슴·양뼈 등 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또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100점 이상의 통형관이 쏟아졌다. 이뿐이 아니다. 여신묘의 벽체 파편에는 회(回)자 무늬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대형 향로뚜껑을 비롯한 각종 제사용기들도 심상치 않은 여신묘의 위상을 전해준다.

또 하나, 이미 언급했듯(경향신문 12월22일자) 진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잇달아 확인되었는데, 중국학계가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주실과 곰(熊)이라고 단정했다.

원래는 용머리(龍頭)로 판단됐지만, 납작하고 둥근형의 입,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 발가락 4개 등 종합적으로 볼 때 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웅녀의 환생 아닌가. 과연 5000년 이상 잠자던 여신의 부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근에 집중된 적석총과 제단, 그리고 이곳 여신묘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경향신문 2007년 12월 28일 17: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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