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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6) - 중국인의 조상 ‘황제’는 동이족었나

‘황제(黃帝)집단=훙산(紅山)문화 대표. 옌산(연산·燕山) 남북지구가 주요 활동범위. 어렵이 주요 경제활동.’

‘신농씨(염제) 화족(華族)집단=양사오(앙소·仰韶)문화 대표. 중원 속작(粟作)농업이 주요 활동범위.’

지난해 7월30일, 이른바 랴오허(遼河)문명전이 열리던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이라는 제목의 전시공간은 기자의 눈과 귀를 멎게 했다. 훙산문화 시대를 오제전설과 연결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황제를 훙산문화 대표로 ‘등록’한 것이었다.
 

▲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공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 벌어진 쌍간허 유역 쭤루의 인근 위센에서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 공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중국인의 조상이라던 황제(黃帝)를 동북의 훙산문화 대표로, ‘염제 신농씨’를 중원의 양사오 문화 대표로 둔갑시켜 놓았다. <선양/김문석 기자> 

-마오쩌둥도 찾은 황제릉-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누구인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닌가. 그런 황제가 동이(東夷)의 땅을 대표한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치우는? 단군은?

굳이 옛날 기록을 들출 필요도 없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孫文)이 서둘러 한 일은 황제(헌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훗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나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1937년 국·공합작 뒤 다투어 찾아간 곳도 바로 황제릉이었다.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었네.”(국민당의 제문)

“(황제가) 위대한 창업을 이루시니~. 그러나 그 후예들은 황제만큼 용맹스럽지 못해 큰 나라를 망가지게 했네.”(마오쩌둥의 제문)

이렇듯 너나 없이 ‘축록(逐鹿) 황제릉!’을 외치며 다투어 황제릉을 향해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제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국통의 상징이자,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으며 “공산당과 국민당도 비록 정치적인 목표가 달랐지만 권력의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황제를 끌어들이려 한 것”(김선자의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책세상)이다. 중국인들은 왜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추앙해온 황제를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하던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으로 바꿔 부르는 것일까. 누누이 강조하듯 1970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된 문명의 흔적 때문이었다.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왕?-

중국의 용 사상이 잉태한 곳이 바로 이곳(차하이·査海·BC 6000년전)이었다. 제단과 신전, 무덤(적석총) 등 3위 일체의 제사유적을 핵심으로 하는 훙산문화가 창조된 곳(뉴허량)도 바로 이곳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의 왕이 존재한 고국(古國)이 탄생한 곳이다.

그러니 중국인의 입장에서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엔 크게 당황했던 중국학계는 정신을 차린다. 바로 전설과 고고학 자료들을 교묘하게 끼워 맞춘다. 우선 뉴허량 출토 곰의 뼈를 두고는 “사마천의 사기에 ‘황제는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곰과 황제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1970년대 말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 지구 쌍간허(상건하·桑乾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2점에 주목한다. 동북 훙산문화의 대표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항아리)과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꽃무늬 채도가 한 곳에서 나온 바로 그 곳. 이는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가 접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중국학계는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사기록을 떠올린다.

“이 장자커우 인근에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가 싸웠다는 반취안(판천·阪泉)과 줘루(탁록·탁鹿)란 곳이 있어요. 중국학계는 바로 이 인근에서 동북 훙산문화 유형과 중원 양사오 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지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피가 백리나 흘렀다”-

사서에 따르면 훙산문화 시기에 즈음해서 문명의 충돌이 두 번 있었다. ‘염제(신농씨) vs 황제’의 ‘반취안(판천) 전쟁’과 ‘황제 vs 치우’의 ‘줘루(탁록) 전쟁’이었다.

“염제(신농씨)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했다. 헌원(황제)은 곰과 범, 살쾡이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여러 번 싸운 뒤에야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켰다. 헌원은 제후들과 함께 나서 탁록(탁鹿)의 들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사기 오제본기)

‘장자(莊子)’에는 “들판에 피가 백리나 흘렀다”고 했다.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인 ‘1·2차 대전’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들에게 황제(헌원)는 이민족의 도전을 뿌리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양문명의 창시자였다. 그야말로 “황제는 중국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정재서 교수의 ‘동양신화’·황금부엉이)였던 것이다.

-염제 vs 황제의 1차대전-

그러나 훙산문화 발견 이후 중국학계는 황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쑤빙치는 ‘통고(痛苦)의 연구’ 끝에 황제의 고향을 중국 동북방, 즉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발해연안에서 찾은 것이다. ‘훙산시대=황제시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고고학 성과와 역사서의 오제전설 기록을 토대로 지금부터 5000년 전후의 문화구를 3대 고고문화구로 나누었다.

즉 훙산문화의 동북문화구, 양사오 문화의 중원문화구,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의 동남연해문화구 등이다. 그리고 고대 전설상의 오제시대를 다시 전·후기로 나누었다. BC 3500~BC 3000년전 시기를 전기, BC 3000년전~하나라 건국(BC 2070년) 이전을 후기로 각각 구분했다.

훙산문화는 바로 오제시대 전기, 즉 양사오 문화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훙산문화는 중국문명 기원 과정에서 한걸음 먼저 나갔으며(先走一步) 양사오 문화와 기북(冀北·허베이성 서북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제1차 대전인 ‘황제 vs 염제 전쟁’이며, 시대는 오제시대 전기(BC 3500~BC 3000년)에 일어난 일로 보았다.

즉 훙산문화의 용무늬 토기와 양사오 문화의 꽃무늬 채도가 싼간허 유역 싼관 유적에서 공반되어 나온 것은 바로 이 ‘황제 vs 염제 전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쉬즈펑(徐子峰) 츠펑대교수의 말처럼 “두 문화가 충돌한 동시에 교류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쑤빙치는 “이렇게 충돌·교류한 문화는 다시 발해연안으로 올라가 그 유명한 훙산문화의 단(제단)·묘(신전)·무덤(총·적석총)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뤘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학계는 동북방과 중원문화의 충돌·교류 이후 훙산 고국(古國)이 탄생했다고 보았지.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은 ‘황제’라는 것이고….”(이형구 교수)

쑤빙치 등은 황제의 고향을 동북방으로 연결했다. 황제가 염제와 싸울 때 함께 전쟁터에 나선 곰과 범, 살쾡이 등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은 부족들의 명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는 일정한 거처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이를 ‘황제족’의 성향을 일컫는 것으로 동북방 민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보았다.
 

-황제 vs 치우의 2차대전-

그렇다면 동이족의 신으로 알려진 치우는 무엇인가. 중국학계는 바로 ‘황제 vs 치우 대전’ 역시 오제전설과 역사서를 고고학 성과와 끼워맞춘다.

즉 ‘황제 vs 치우’전을 오제시대 후기(BC 3000~BC 2070년)에 일어난 ‘사실’로 본 것이다.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황제족과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치우족의 문화, 즉 다원커우 문화가 역시 충돌·교류한 증거라는 것이다.

BC 3000년 무렵 다링허(大凌河)와 시랴오허(西遼河)에서는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이른바 훙산후(紅山後) 문화라 하는 샤오옌(소하연·小河沿)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는 다시 조기 청동기-샤자뎬(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공두(鏤孔豆·구멍뚫은 굽달린 접시)와 주전자(壺), 고족배(高足杯·다리가 높은 그릇) 등 다원커우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들이 속출한다. 바로 이것이 동북방(훙산문화 계열)과 동방(산둥반도)의 충돌 및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염제 싸움을 먼저, 황제·치우 싸움을 나중에 기록했다”면서 “고고학 성과를 검토하면 역사서가 딱 들어맞는다”고 자화자찬한다.

-치우는? 단군은?-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이 해석대로라면 훙산문화의 창조자와 치우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훙산문화의 주인공은 황제이고, 산둥반도 다원커우 문화의 주인공이 치우라는 이야기이니….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황제·전욱·제곡·요·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본다는 것이다. 훙산문화를 꽃피운 것은 바로 황제라는 것이다. 후계자 전욱(전頊)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는다. 뉴허량 신전에서 끊어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혼자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전욱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곡(帝곡·3대왕)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고 했다.

모골이 송연하다. 이미 ‘하상주 단대(斷代)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BC 2070년이라 확정한 중국이다.

그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이다.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 즉 훙산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된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문명 탐원공정’의 핵심이다.

우리 학계는 중국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은 망령과, ‘실증할 수 없다’는 지나친 결벽증(?) 탓에 제대로 된 연구조차 ‘재야사학’이라며 무시하고 있다. 그런 사이 중국학계는 이미 ‘중국문명 5000년’의 틀을 짜놓고 있는 것이다.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적석총과 빗살무늬 토기, 그리고 곰 숭배의 원형들….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로 그 역사가 황제의 역사라면, 치우와 단군, 그리고 웅녀 등 우리 민족의 흔적은 깡그리 무시되는 셈이다.

전설과 고고학 성과를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중국학계의 움직임과 우리 학계의 무력함에 기자는 가슴이 탁 막혔다.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닷컴|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2008년 01월 18일 17: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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