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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7) - 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전국7웅’은 왜 작은나라 ‘중산’을 왕따시켰나

1974년 11월,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싼지셴(三汲縣). 수리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진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 1974년 중산국의 실체를 드러낸 허베이성 핑산 싼지셴 유적. 이곳에서 중산국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중산왕 착(錯)의 무덤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됐다. 정(鼎·예기로 쓰인 솥)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 등 강대국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이형구 교수 촬영

“중산왕인 착(錯·조 라고도 읽음)의 왕릉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되었고, 왕릉에서 출토된 정(鼎) 등 각종 예기에서 전국시대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어요.”

이제 일찍이 ‘전국시대의 중산국사략(대만대 학술지 ‘사원(史原)’ 11호, 1981)을 집필한 바 있는 이형구 교수(선문대)와 더불어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춘추전국시대, 그 약육강식의 혼란기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던 소국, 그러나 비록 작지만 강했던 나라, 바로 ’선우(鮮虞) 중산(中山)국‘의 신비를 풀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왜 하필 이 조그만 나라를 주목하느냐. 바로 이 나라가 바로 동이의 나라요, 기자(箕子)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불꽃처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다 사라진….

■ 전국시대의 개막

이제부터 그 ‘선우중산국을 만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자. BC 1046년 무렵. 동이의 나라 은(상)을 멸하고 나서 들어선 한족의 (서)주는 BC 770년 오랑캐의 침입을 피해 낙읍(洛邑·지금의 뤄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른바 (동)주시대의 개막이다.(자세한 내막은 4월12일자 경향신문 23면 참조)

천자의 추상 같은 권위가 무뎌지고 170여개국의 나라가 난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이 모든 나라들이 제후국이라는 이름으로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했다. 다만 제후국 가운데 특히 강한 나라의 제후(覇)가 천하를 쥐락펴락했으니 그것이 바로 ‘춘추5패’이다. 춘추시대라는 말은 (동)주 시대의 전반부 즉 BC 770~BC 475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공자가 쓴 춘추(春秋)는 엄밀하게 말해 노(魯)나라 은공(BC 722년)~애공(BC 481년)의 242년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일반적으로 주나라 위열왕 23년(BC 403년)부터 진(秦)시황의 천하통일(BC 221년)까지를 일컫는다. 사연을 들춰보면 이렇다. 춘추시대 가운데 중국 중원에서 강대국을 형성했던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강대국의 권력이 차츰 왕(제후)이 아니라 6경(卿·대부)으로 넘어간다. 지(知)·한(韓)·위(魏)·조(趙)·범(范)·중항(中行)씨였다.

6대부는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인다. 마침내 한·위·조씨가 연합, 범·중항씨에 이어 지씨마저 몰락시켰다.(BC 453년) 그러자 명목상의 천자에 불과했던 주 위열왕은 한·위·조씨를 제후로 봉한다.(BC 403년) 역사는 이를 두고 삼가분진(三家分晉), 즉 세 집안이 진나라를 분할했다고 기록한다.

이때부터 원래의 진(晉)나라는 물론 천자국 주나라의 권위까지 완전히 상실됐고, 둘 다 한낱 소국으로 전락한다. 천하는 본격적으로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미증유의 전쟁시대, 즉 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춘추시대부터 살아남은 4국, 즉 진(秦)·초(楚)·연(燕)·제(齊·제나라는 姜씨에서 田씨로 왕통이 바뀌었다)와 진(晉)나라에서 분열된 신흥강국 한·위·조 등 3국을 합해 바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이 전국시대는 약육강식 시대의 절정, 그 자체였다.

역시 예약이 무너지고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춘추시대엔 그나마 천자인 주나라의 눈치를 보는 측면이 강했다. 누구도 감히 천자를 칭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단 하루라도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 “중산국을 왕따 시켜라!”

자 이제, 이런 배경을 알고 선우·중산국 이야기를 풀자. 먼저 전국책(서한시대 유향이 전국시대 유세객들의 책략을 모은 책)을 보자.

 
    ▲ 착왕 묘에서 확인된 솥. 다리는 철제(鐵)로 만들었고, 몸통은 청동이다.

“중산이 연·조나라와 함께 왕이 되자 제나라는 국경의 관문을 닫고 중산(中山)의 사신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우리(제나라)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이고 중산은 천승지국(千乘之國)에 불과한데, 어찌 우리와 함께 왕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가?’ 했다.”(전국책 ‘중산책’)

이는 BC 323년 다섯나라, 즉 제·위·조·연과 함께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동방의 강대국인 제나라로서는 소국인 중산국과 어찌 같이 놀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참고로 당시엔 황제(皇帝)의 개념은 없었다. 천자를 뜻하는 황제라는 말은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서 황제(皇帝)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왕(王)은 곧 천자를 뜻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진 전국시대엔 저마다 천자를 칭한 것이다.

또 하나 만승이니 천승이니 개념에 대해 보자면, 만승지국은 전쟁이 났을 때 전차 1만승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즉 천자국을, 천승지국은 제후국을 뜻하는 말이다. 제나라 왕은 ‘천승의 나라’에 불과한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이 못견디도록 아니꼬웠나보다. 조·위나라는 물론 연나라에 뇌물까지 주어 “(주제 넘게 왕을 칭한) 중산국을 함께 치자”고 했으니 말이다. ‘왕따’의 전형이다. 당시 중산국왕이 유세가 장등(張登)을 불러 했다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까 두렵소이다. 왕호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대가 아니면 구해줄 자가 없소이다.”(전국책 ‘중산책’)

그러나 다행히 장등이 나서 세치 혀로 외교전을 펼쳐 당사국들을 설득시키면서 왕의 칭호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당대 중산국이 전국 7웅 가운데, 제·위·조·연이라는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국 12웅(전국 7웅+宋·魯·衛·越·中山)의 하나로 꼽혔으며, 급기야 다른 강대국과 함께 왕호를 칭할 수 있을 만큼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 끝내 식민지가 된 중산

이 중산국은 앞선 춘추시대에는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사기색은’(索隱·당나라 사마정이 사기를 주석한 책)은 “중산은 옛 선우국”이라 했다. 춘추좌씨전 정공 4년조에는 “중산선우”라고 표현했고, 또 청나라 때 왕선겸(王先謙)이 작성한 ‘중산국사표강역도(中山國事表彊域圖)’에는 “중산은 춘추시대에는 선우인데 중산으로 바뀌었다”고 나와있다.

선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 것은 BC 530년이다. 그런데 첫 기록부터가 전쟁 기록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껴서 고난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이런가.

“6월, 진(晉)나라 순오가 회합을 가장하여 선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해서(假道於鮮虞) 비(肥)나라를 쳤다. 10월에는 진나라가~비나라의 일을 이유로 선우를 정벌했다.”(춘추좌전)

‘가도(假道)라’. 임진왜란 때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계가 떠오른다. 진나라 역시 ‘가도’의 구실삼아 선우를 친 것이다.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진나라와 선우의 싸움은 BC 489년까지 41년 동안 무려 8차례나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은 진나라가 도발했지만 BC 507~BC 489년 사이에 벌어진 4차례 전쟁에서는 선우가 3승1패의 우위를 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하지만 춘추말 전국초에는 선우가 중산국으로 바뀐다. 선우와 중산이라는 이름들이 춘추좌전이나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사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기록상 중산의 건국연대는 상당히 늦다. 사기 ‘조세가’는 “BC 414년 중산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세본(世本)은 “중산 무공은 고(顧)에 거주했고, 환공(桓公)이 영수(靈壽)로 천도했다”고 했다.

어쨌든 중산의 역사 역시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선우 시절엔 진(晉)이 괴롭히더니 전국시대에 돌입하자 신흥강국이 된 위(魏)가 ‘중산 왕따 작전’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위나라 초대왕 문후는 BC 408년부터 3년간이나 중산을 친다.

당시 중산을 친 이는 위나라 장수 악양(樂羊)이었는데, 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다. 다급해진 중산국은 악양의 아들을 삶아 그 국물을 보냈지만 악양은 눈하나 꿈쩍 하지 않고 그 국을 마신 뒤 중산국을 친다. 중산국은 결국 멸망하고(BC 406년) 위나라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위나라 왕(문후)은 아들을 삶은 국을 마신 악양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크게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하 중 한사람이 그랬다지.

“(악양이) 그 아들의 살까지 먹었는데 누구의 살(임금을 지칭)은 먹지 못하겠습니까?”(전국책 ‘위책’)

어쨌든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중산은 남녀가 밤낮으로 껴앉고 비벼대며, 슬픈 노래를 좋아하고 질탕하며 그것이 나쁜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망국의 풍습”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는 망국의 역사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조그만 나라가 3년이나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견딜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 전국 12웅으로 뜨다

그러나 중산국은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한다.

“사기 ‘악의열전’에는 ‘중산이 위나라에 멸망 당했지만 제사는 끊어지지 않았고 후에 나라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패륜의 풍습을 지닌 나라였다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었겠지.”(이형구 교수)

어쨌든 중산국은 20여년 만인 BC 380년을 전후로 다시 복국(復國)했다. 중산 환공이라는 인물이 이때 도읍을 영수(靈壽·지금의 핑산·平山)로 옮겨 증흥의 기틀을 다졌을 것이다. 중흥군주(환공)의 치세에서 중산국은 욱일승천한다.

BC 296년 조나라 무령왕에게 최후 멸망을 당할 때까지 80여년간 남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이룬다. 복국(復國) 이후 ‘중산국 왕따작전’의 계보는 조나라로 바뀐다. 정말 지긋지긋한 ‘집단 괴롭힘’이다. 선우 시절엔 진(晉)나라가 괴롭히더니 중산국 시절엔 위나라 때문에 끝내 멸망했고, 20여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회복했더니 이번엔 조나라가 앞길을 막고 있지 않은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우리 역사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이형구 교수)

그러나 복국 이후 영수로 천도한 중산국은 예전의 중산이 아니었다. BC 369년 조나라와의 국경선에 장성(長城)을 쌓아 조나라의 내습에 대비한다. 이후 70여년간은 도리어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에 반격을 가하는 반전의 시대가 도래한다. 중산국을 소국으로 여기는 조나라로서는 치욕의 나날이었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8년 04월 18일 17: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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