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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1) - 반세기 넘게 우리를, 고향을, 목놓아 부르다

잊혀진 땅 사할린에는 아직도 4만 300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 중 99%가 일제가 모집한, 혹은 강제로 끌려온 이들과 그 후예들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존재 자체가 우리의 아픈 역사이며 일제 식민지의 증거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오래 잊혀졌으며, 참혹하게 방치됐다.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민족21》은 지구촌동포연대(KIN)와 6회에 걸쳐 공동기획 ‘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말한다’를 시작한다. 그들을 잊었던 것은 우리이며, 그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집에 갈 수 있겠지!”

수많은 조선인들은 멀리 일본 홋카이도쪽 바다를 바라보며 조국으로 데려다 줄 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배는 일본인만 태우고 가버린 채 60년이 흘렀다. 이곳을 조선인들은 ‘망향의 언덕’이라 부른다. 사할린 남단에 위치한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에는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 세상을 뜬 수많은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200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해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그대로 보듬은 채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조선민족’이 있다. 그 중에 러시아 사할린, 해방 전까지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에는 수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 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바라본 바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애타게 기다렸다.이은영

강제징용 탄광마을 브이코프에 가다

지난 3월 5~12일 8일간의 여정으로 사할린에 다녀왔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지구촌동포연대(이하 KIN)에서 2008년 주요 사업으로 ‘사할린 캠페인’을 기획 중이기에 사전조사를 겸한 방문이었다.

그런데 벌써 세 번째 방문이어서 그런지 애틋한 감정이 많이 옅어진 듯하다. 이렇게 감정이 사그라들듯 사할린 한인의 역사 또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과거가 잊혀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건너올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미처 내려놓지 못한 채 이곳에 남아 그대로 살아야 했다. 우리가 함께 짊어졌던 짐이었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가 우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봉순 할머니(1925년생), 김화애 할머니(1918년생), 김복녀 할머니(1924년생), 김분이 할머니(1920년생), 김옥지 할머니(1912년생), 박덕화 할머니(1926년생), 정달조 할머니(1920년생). 현재 브이코프 마을에 생존해 있는 한인 1세들이다.

지난 2007년 KIN은 ‘사할린 한인 역사회복을 위한 국제워크숍’을 이곳 사할린에서 개최했다. 브이코프를 방문했을 때 안해준 회장(브이코프 이산가족회 회장)으로부터 “80세 이상의 한인 1세 고령자가 일곱 분 계시는데 형편도 어렵고 거동조차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10명의 참가자들은 한국에 돌아와 ‘브이코프 한인 1세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1만원씩 모으기 시작했다.

1차 모금 전달은 2007년 10월에, 그리고 2차 모금 전달은 이번 방문에 하게 됐다. 2차 모금 전달을 할 때는 여섯 분에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이미 한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모금 전달과 함께 김복녀 할머니댁을 찾았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남 진주다. 1941년 16세에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 시로 건너왔다가 1946년도에 브이코프로 옮겨 왔다. 자식 중 한 명은 중풍을 앓았다고 한다. 수족이 불편한 자식은 어머니의 눈이 되고, 눈이 안 보이는 어머니는 자식의 손발이 되어 지냈다.

그 자식은 5년 전에 죽고, 지금은 형편이 넉넉치못한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혼자 살고 계신다. 자식들은 가끔 집에 들러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다. 지난해에 한 분이 돌아가셨듯이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1세들의 자취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분들의 역사는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다.

브이코프 탄광은 일제시대뿐만 아니라 옛 소련 시절에도 규모면이나 품질면에서 유명했던 곳이었다. 또한 사할린의 다른 탄광지역과 비교했을 때 강제징용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사할린으로 건너온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모집’이라는 미명 하에 먹고 살 방도를 찾아 조국땅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도 그러했듯이 사할린으로 건너간 조선인들도 끌려가지만 않았을 뿐 ‘강제’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브이코프 탄광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노동력을 긴급히 보충해야 했던 상황에서 ‘모집’이 아닌 ‘징용’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일본어에 익숙해질 시간조차 부족해 일본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구타당하기 일쑤였으며, 원활한 물자공급이 되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극도로 부족해 고된 노동과 배고픔, 추위,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 일제 말기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들이 집단촌락을 이루었던 브이코프 마을. 지금도 적지 않은 한인들이 살고 있다.이은영

에트노스 예술학교의 한인 아이들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외롭고 힘든 생활을 견디기 위해 그들은 ‘형제서약서’라는 것을 만들었다. 자기 사진을 붙이고, 자신의 고향을 적고, 이름, 생년월일을 적어 형제서약서를 만들어 서로 나눠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눈물의 역사를, 브이코프 한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오로지 1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이 다 죽고 나면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브이코프 뿐만 아니라 사할린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기록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안해준 회장은 브이코프에 한인들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자그마한 박물관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브이코프 마을에 있는 관공서 건물 안의 방 한 칸을 빌려 작게나마 한인의 역사를 남기려는 것이다. 건물이 너무 낡아 수리하는데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재정문제 외에도 자료 수집, 추진할 사람 등 한 사람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지혜와 관심이 절실하다.

과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작업과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혀 올바른 과거청산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브이코프에 한인박물관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사할린 한인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사할린의 역사는 과거 조선민족의 역사이며, 그 역사가 온전히 보존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역사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트노스 예술학교에 들어가자 아이들이 북을 치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조선아이처럼 생긴 아이, 피부색과 눈동자색이 조선아이와는 조금 다른 아이. 우리의 초등학교 1학년에서 6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혼신을 다해 열심히 북을 두드리고 있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맹연습 중인 것이다. 우리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아이들이 조금은 어색해하는 것 같다.

  
   ▲ 북 연습을 하고 있는 에트로스 예술학교 학생들.이은영
    
에트노스 예술학교는 1991년에 설립되어 가야금, 무용, 풍물 등 7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일반 학교 아이들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일반과목 수업도 들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며, 연습까지 해야 한다. 이번처럼 대회가 있으면 방학도, 쉬는 날도 없이 하루 종일 연습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간다고 한다. 음악이든 무용이든 조선 예술로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왜 평생 업으로 삼을 것도 아니면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일까. 부모의 뜻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말이 통하지 않아 아이들과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지만 연습할 때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왠지 뭉클해졌다. 아이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가 동포들에게 쉽게 부여하는 민족의식 같은 것은 아이들에게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지켜주고 싶었다.

‘무엇을 지켜주겠다는 것이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혹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60년 이상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부채의식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와 함께 사라져 가는 한글

해방 후, 러시아 당국은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학교에서 일본글과 일본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대로 두어선 안된다’며 사할린 여러 곳에 조선학교를 설립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인의 귀환이 끝나면서 일본학교가 폐쇄됐기에 그곳에 다니던 학생들은 전부 조선학교로 넘어갔다.

그러나 사할린 조선인 사회에는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말을 할 줄 알아도 가르칠 줄 몰랐다. 그래서 일본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다시 학교에 취직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말로는 조선인학교라 했으나 학생들은 모국어를 거의가 몰랐고 가르칠 자격이 있는 교원들과 교재도 전혀 없었다.

이런 조선학교도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옛 소련 당국의 폐쇄령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1998년부터 한국어 교육이 재개돼 현재 11개 학교에 13명의 교사들이 1000명의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조선학교’라는 이름으로 된 학교는 없으며 학교부설 한글학교 등 비정규과정으로만 남아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있는 동양어문학교(제9학교)가 외국어학교로는 유일하게 우리말을 가르칠 뿐이다.

‘교육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큰 문제냐’고 물으면 사할린 한인들은 입을 모아 한글교사의 부재, 즉 교사를 양성시킬 수 있는 시스템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조선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는 우리말을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지금은 교사를 하고 싶어도 턱없이 낮은 월급 때문에 한국어과를 졸업한 대학생들마저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할린의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차로 7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뽀로나이스크라는 곳이 있다. 250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지난해부터 새로운 기획이 시도되었다. 뽀로나이스크에 있는 민속박물관 내에 ‘한국관’을 기획해 전시를 시작한 것이다.

과거 조선학교의 모습들, 그 당시의 자료들, 한국 전통문화 관련 물품 등 전시물은 많지 않았지만 지역민들에게 고향의 것들을 알리려는 시도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한국관을 개관하기 위해 사할린 한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편 뽀로나이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레오니도위촌에는 전쟁이 끝나고 일본 경찰들에게 학살된 조선인 16명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있다. 하지만 뽀로나이스크 시와 협상과정에서 땅의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석만 세워두게 되었다. 앞으로 이 비석이 ‘불법 점유’를 이유로 철거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저 배만 타면 갈 수 있는데…’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는 한인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위치 선정이 잘못된 탓일까. 바닥에 적혀 있는 비문은 먼지가 가득 쌓여 무엇을 위한 조형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관리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조형물에는 여기저기 낙서가 되어 있고,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곳 망향의 언덕은 사할린 한인들, 특히 1세들에게는 통한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저 배만 타면 갈 수 있는데….’ 하지만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타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평생 동안 고향을 그리며 살아갔다.

이를 사할린 한인 스스로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문제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을 보면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며 반갑다고 집에 데려가 밥 차려주고 고향에 대해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했다고 한다.

그분들은 반세기가 넘게 고향을 그리며 우리를 목놓아 부르지 않았을까. 물론 사할린 한인 사회에도 현존하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해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잊었던 것은 우리이며, 그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족21·KIN공동기획 | 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말한다①  
 [85호] 2008년 04월 01일 (화)  이은영 지구촌동포연대(KIN) 간사  minjog21@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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