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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2) - 일제에 의해 소련 땅에 버려진 조선 사람들

사할린 섬, 카라후토, 화태. 러시아의 극동에 위치하여 쿠릴열도와 함께 사할린 주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섬은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만큼이나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복잡한 역사의 실타래에 우리 한인들은 어떻게 엉켜 사할린 최대의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중국과 몽골제국, 러시아, 일본의 쟁탈전

남부의 아이누족과 중부의 윌타족, 북부의 길랴크족 등의 선주민들이 살고 있던 사할린은 당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대륙과 교류를 시작했다. 1264년 몽골제국은 3000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선주민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도록 했고, 1411년 명나라는 사할린에 영사관을 설치하여 아이누족과 교역을 실시하기도 했다.

    
▲ 사할린 섬의 원주민
사할린 섬에는 남부의 아이누족과 중부의 윌타족, 북부의 길랴크족 등이 살고 있었다. 그 후, 당나라와 몽골제국, 러시아, 일본 등이 진출하며 사할린은 외부와의 교류를시작한다.

13세기에 들어서는 일본 탐험대도 이 대열에 동참하여 이곳 사할린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어 17세기에는 러시아와 덴마크 탐험대도 이 섬에 진출하게 된다.

극동에 위치한 이 섬은 이렇게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지만, 본격적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복잡한 역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풍부한 천연자원에 눈독을 들이며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면서부터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이 이주해 정착했다는 이유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일본과 이에 맞서 사할린을 유배지로 만들어 많은 죄수들을 이주시킴으로써 자국영토로 편입시키려 한 러시아의 대립은 1875년 러일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을 계기로 사할린 섬 전체가 러시아령이 되면서 일단락된다.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1875년 러·일 간의 샹트페테르부르크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되지만,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사할린의 남부를 차지하여 사할린은 북부의 러시아와 남부의 일본에 의해 양분된다.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근대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할린도 여기서 예외로 될 수 없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 이후 러시아 영토였던 사할린은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섬의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북위 50도 이하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곧이어 1910년의 한일병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조선인(이하 한인)의 사할린 이주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사할린과 한인의 악연도 시작된다.

한편, 군국주의 일본은 1937년 만주전쟁에서 군수산업 부문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39년부터 모집의 형태로, 1942년부터는 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의 형태로 조선인들을 사할린으로 연행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사할린에 있던 군수공장으로 해상 연료운반사업이 어렵게 되자 자국 영토내의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할린에서 조선인 탄부 1만 명 이상을 일본 본토로 파견해 이중징용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의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 사할린으로의 대량이주
한일병합 후 일제에 의해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대량 이주를 하고 패전 후에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인들은 귀국대상에서 제외되어 현지에 버려진다.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닫고 있던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일본령이었던 사할린 남부로 진격한다. 그리고 9월 2일 일본이 정식으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 항복을 선언하면서 사할린은 소련점령지로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일본이 패전하고 사할린이 소련의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사할린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본토로 피난을 시작하는데, 본격적으로는 1946년 말 ‘소련지구 귀환 미소협정’에 의해서 귀국사업이 대규모로 이뤄진다.

그런데 한인들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미소협정에서 귀국대상이 된 것은 ‘일본인 포로’와 ‘일반 일본인’이었는데, 일본은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이유로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며 귀국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의복권재단 김복곤 이사장은 “일본은 우리를 귀향시켜야 할 법적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가 자유롭게 해방되었다면서 팽개쳐 버렸다”며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했다.

더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현지에 버려져

사할린 한인들의 비극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사할린에 상륙하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이 소련군의 스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스파이 용의를 받은 많은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이 사건들은 1945년 8월 15일 레오니도워촌에서 일본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나 1945년 8월 20일 포자르스코예에서 6명의 아이를 포함한 27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일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렇게 러시아의 극동 외딴 섬에 남겨진 한인들은 해방 당시 4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소련영역내 거주하는 자로서 소련국적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자는 무국적자로 간주한다’는 소련 국적법에 따라 종전 직후 무국적자로서 거주, 취업, 교육 등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게 되었고, 1950년에 이르러서야 소련이나 소련의 우방인 북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소비에트 정권의 본격적인 통치가 실시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지의 한인들을 위한 조선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학교는 1963년 사할린 주행정부의 결정으로 폐지되는 운명을 맞게 되고,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의 말과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여건조차 박탈당하게 된다.

다행히도 끊겼던 민족교육은 1988년 재개되는데, 전 사할린 주 한글교사 협회장 공노원 씨는 “사할린 한인들의 요망사항인 우리말 교육은 사할린 주 교육부가 담당하는 교육제도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 1988∼89학년도부터 한국말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그리고 1990년 한소 수교를 통해 양국 간의 상호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맞게 되고 1992년에는 사할린에서 조선학교가 말살된 지 29년 만에 과거 조선학교가 있던 자리에 유즈노사할린스크 9학교가 동양어문학교로 전환되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도 한다.

    
▲ 불완전한 영주귀국사업
냉전시절 국교가 없던 고국(한국)으로의 귀국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냉전이 끝나고 한국과 소련 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간헐적으로 영주귀국사업이 실시된다.

국교도 없는 러시아 땅에서의 고립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대부분 남쪽 출신으로 일본을 거쳐 사할린까지 오게 됐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 한소 수교 이전까지의 냉전시절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조국으로의 귀환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일 양국간의 사할린 동포 모국방문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또 1990년 한러간의 국교수립 이후에는 사할린고려인연합회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영주귀국을 요구하는 등의 노력에 힘입어 1992년 사할린 독거노인 72명의 영주귀국이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이후 15년간 1700명의 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3500여 명의 한인 1세들이 영주귀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 영주귀국사업도 그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 영주귀국 대상이 1세들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영주귀국사업이 또 다른 이산가족을 양산하고 있다. 새고려신문사

불완전한 영주귀국사업

2002년 10월 현재, 러시아 공식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사할린 한인은 총 2만 9592명으로 추정되며, 외교통상부와 대한적십자사의 조사에 의하면 한인 1세 인구는 3500∼4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7월 사할린을 방문한 KIN의 정진경 씨는 “3세 청년들은 현지의 러시아인과 섞여 모든 면에서 러시인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 반면, 어려서부터 민족교육을 받은 2세들은 여전히 쌀밥을 주식으로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며 현지의 모습을 전한다.

한편, 주로 연금(한화로 약 20∼3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2세들의 생활은 러시아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급격한 물가상승이 나타나면서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특히 돌린스크시 ‘브이코프’ 탄광촌의 400여 명 한인들은 과거 1940년대 탄광촌의 열악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 사할린 돌린스크시 브이코프에는 아직도 예전의 탄광촌 모습 그대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이 많다. KIN

 민족21·KIN공동기획 | 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말한다 ②  
 [86호] 2008년 05월 01일 (목)  허재철 기자  touitu@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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