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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3) - 영주귀국 소망이뤘지만 이산가족 된 사할린 한인들

고향마을을 찾은 5월 8일은 때마침 어버이날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사할린 생활을 마감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자식들을 사할린에 남겨 두어야 했던 이들의 마음은 편치 않으리라. 특히 오늘과 같은 날에는.

이런 생각에 이날 방문이 좀 무거운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됐지만, 마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조금씩 들려오는 꽹과리 소리에 어느새 발걸음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경기도 안산시, 지하철 4호선 한양대역 바로 앞에 위치한 ‘고향마을’은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귀국촌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전에 출생하여 사할린 현지에서 부부가 모두 생존한 이들에 한해 이곳으로 와 새 살림을 꾸린다. 이곳에 와서도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 사망하거나 병환으로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게 되면, 여기를 나와 인천에 있는 복지관 등으로 옮기게 된다.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촌, 안산 고향마을

‘고향마을’은 아파트 단지형태였다. 단지 입구에 들어선 기자와 KIN(지구촌 동포연대) 관계자들을 맞이한 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분위기를 흥겹게 북돋우는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젊고 정정한 것에 기자가 놀란 눈치이자 옆에 있던 한 관계자가 “오늘 어버이날 행사를 위해 온 사할린동포 후원회 자원봉사자들”이라고 설명해 준다.

‘2008 어버이날 고향마을 어르신 한마당’이라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던 이날, 꽹과리가 마을을 한바탕 깨워 놓고, 행사 시작시간인 10시가 되어 가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단지 가운데에 있는 회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망새 방과후 학교’의 중학교 학생들이 뛰어다니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고, 고마워.” 손자, 손녀 같은 어린 학생들이 달아주는 카네이션에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오늘 행사는 ‘노래길 동무들’이 주관하고, ‘희망새 방과후 학교’ 학생 40여 명 및 관계자와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가 주최했다. 행사장 출입구 옆에서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무대 진행을 바쁘게 준비하고 있던 노래길 동무들 신창화 예술단장.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친목, 봉사모임입니다. 주부나 직장인들이 많죠.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런 행사에 참가하게 됐어요. 물론 자발적으로요. 4월 19일에는 인천의 사할린 한인분들을 위해 공연을 했고 오늘은 여기 안산이지요.”

학생들의 태권도 시범과 수화공연, 노래길 동무들에서 준비한 각종 공연 등으로 어느새 회관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국에 못 와보고 사할린에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뜨거워진 열기에 잠깐 밖에서 쉬고 싶었는지, 한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간다.

“재미있는데 왜 벌써 나오셨어요?”

“아이고, 재미는 있는데 너무 더워. 바람 좀 쐬야지. 근데 어디서 왔는가?”

할아버지도 쉬는데 말동무가 필요했는지, 반가운 기색으로 기자의 말을 받아 주었다.


올해 80세인 정연석 할아버지. 2001년 이곳 고향마을이 지어졌을 때, 사할린에 2남 3녀의 자식들을 남겨두고 할머니랑 같이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건 경남 통영이야. 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사할린으로 가셨는데, 그후 가족들도 따라 들어갔지. 난 1944년에 사할린으로 갔어.”

그후 부모님은 모두 사할린에서 돌아가시고, 6남매도 누님 한 분과 자신만 남고 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누님은 지금 인천에 있는 사할린 한인 마을에서 살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오시니깐 좋으세요?”

“좋기야 좋지. 근데 이 귀국사업이 너무 늦게 시작됐어. 고국에 못 와보고 사할린에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몇 년만 빨랐어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은 너무 늦게 시작됐다. 해방 직후 사할린은 소련 땅이 되었고, 냉전시대가 계속되면서 국교도 없던 한소관계에서 사할린 한인 문제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1988년 올림픽을 여는 등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어 가면서, 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0년대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할린 한인들의 첫 모국 방문은 1989년 12월 15일, 23명이 처음이었다.

“억울한데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말도 못했지. 사람들은 마음이 아파 독한 술만 마셔댔어. 그래서 몸 상해 죽은 사람도 많은 거고.”

정연석 할아버지가 피부로 느낀 영주귀국 사업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기뿐만이 아니었다. 영주귀국 대상자가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여기 오려면 부부가 다 살아있어야 하잖아. 그러니깐 거기서 혼자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여기 오려고 급하게 결혼하기도 하고, 집사람이 러시아 사람이면 여기 못 오니까 러시아 여자 내팽개치고 한인이랑 결혼해 오는 경우도 있었어.”

문제는 또 있다.

“여기에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고. 다들 이산가족이 되어 버렸으니깐….”

영주귀국 사업이 취지에 맞지 않게 또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문제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일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본 얘기가 나오자 “일본놈들, 전쟁 끝나니깐 자기네 사람들만 싹 데리고 가고 우리들은 그대로 버려두었지”라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현실적으로 지금 일본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사할린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여기에 자주 오고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돈이 비싸 자주 오고가지도 못 해. 일본이 이 돈을 내야 해”라고 말한다.

일본도 문제지만, 러시아도 책임 크다

정연석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 즈음, 젊은이랑 노인네가 무슨 얘기를 저리 열심히 하고 있나 궁금했는지 두 사람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얼굴이 너무 닮아 신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지간이었다.

  
김윤택(77) 할아버지와 김익택(73) 할아버지는 지난해 9월 이곳에 오신 신참(?)이었다. 사할린 생활에 너무 적응이 됐고, 가족들도 모두 사할린에 있어 이곳에 오기 싫었다는 두 할아버지. 하지만 한국이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바꿔 오게 됐다고 한다. 형인 김윤택 할아버지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1939년 홋카이도에서 바로 사할린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셨는데, 탄광이 무너지는 바람에 크게 다쳐 나중에는 탄광에도 못 나가고 농사일을 했지. 러시아에서도 차별은 심했어. 일제시대에는 일본놈들한테, 해방되고 나서는 소련놈들한테 차별 받고 자랐어. 대학 나와도 큰일을 못했지. 요즘에는 질좋은 한국산 물건들이 들어와 인식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사할린에서 배 고치는 일과 버스, 짐차 등 운전 일을 했다는 두 할아버지는 사할린에서 겪었던 차별을 떠올리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사할린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책임에 관해서는 많은 요구가 있었다. 그 결과 이 곳 안산의 고향마을도 한국이 토지를 제공하고 일본이 건축비를 제공하는 형태로 완성됐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자 노인회 고창남 회장은 당시 소련 정부의 무관심과 비협조, 현 러시아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한다.

“일본도 그렇지만, 이제는 러시아에게도 문제제기를 강하게 해야 해. 50년 가까이 소련은 사할린에서 조선인 문제는 없다고 주장해 왔거든. 자기네가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만 했지, 문제해결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

이곳에 살고 있는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자들은 한 달에 35만원의 생계비를 지급 받고 있다. 한국에 돌아와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에 많이 가봤냐는 질문에 이들은 “돈이 없어 못 가. 택시 타고 다니기에는 돈이 부족하고, 버스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 힘들어. 차만 있어도 사할린에서 배운 운전솜씨로 이곳저곳 돌아다닐 텐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정부로부터 특별보상비는 전무

현재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들은 다른 일반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약 35만원을 수급받는 것 외에는 정부로부터 어떤 특별보상비도 지급받고 있지 못하다. 일반 노인들과의 형평성 차원에서라는데 이 부분도 많은 논란이 있다.

기자와 대화 도중 종종 두 사람은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아무래도 한국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편하기 때문인 듯 했다. 거기에 때로는 일본어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 일제시대 때는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고, 해방되고 나서부터 1963년 조선학교가 폐쇄되기 전까지는 조선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웠지. 그리고 나서부터는 줄곧 러시아어를 사용해 왔으니깐. 근데 지금 밖에 나가면 웬만한 간판은 읽을 수만 있지 뜻을 모르는 게 많아 걱정이야.”

한국의 노인들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사할린 동포들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을까. 그도 그렇지만 사할린 현지의 우리말 교육에 대한 지원도 시급하다. 사할린 현지에서는 현재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어 우리말을 사용할 줄 모르는 2, 3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과 일본, 러시아로부터 오랜 기간 방치되다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이 영주귀국 사업이 사할린 한인들은 물론, 그 가족들을 또 한번 울리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답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바로 일그러진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귀국자나 아직 사할린에 남아 있는 이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민족21·KIN공동기획 | 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말한다 ③  
 [87호] 2008년 06월 01일 (일)  허재철 기자  touitu@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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