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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문제연구고문의 연구레포트

일한병합과 시마네(島根)


『우메 켄지로(梅謙次郎)박사의 상』(마쓰에시립도서관 구내)
       
서두
올해는 서기 1910년의 일한병합으로부터 딱 10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한병합을 주제로 한 행사와 연구회가 각 곳에서 개최됐다.

6월 19일, 20일에 동경에서 동아시아근대사학회가 「한국병합-왕조체제의 멸망과 일본-」이라는 테마로 연구발표와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연구발표에는 시마네현 다케시마연구회가 지금까지 협력하기도 하고, 강연을 부탁드린 츠카모토 다카시(塚本孝), 하라타 타마키(原田環), 후지이 켄지(藤井賢二)씨도 함께 나오셔서, 시마네현에서도 몇 명 참가자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가해 듣게 됐다.

다케시마(독도)가 시마네현(島根県)의 소속이 되는 건 1905년으로, 일한병합 직전인 까닭에 각 연구발표와 심포지엄을 통해 느낀 역사적 사상(事象)도 많아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기회에 직접 다케시마(독도)문제와 관련은 없지만, 20세기 초기 시마네현의 조선과의 관계를 조금 정리해보고자 한다.

1.우메 켄지로(梅謙次郎)와 시마네현 법정회(島根県法政会)
 이번의 연구발표로 하라다(原田環)씨는「병합에 이르는 시기의 대한제국의 정치상황」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일청전쟁 후, 중국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끊은 이씨조선은 1897년부터 국왕인 고종이 황제, 국명을 대한제국이라 칭했다. 이 대한제국에 일본은 점차 권력을 확장, 1905년에는 통감부라는 지배기관을 설치했다. 1910년의 일한병합까지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소네 아라스케(曽禰荒助),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통감으로 취임해 현지(대한제국)에서 지휘에 임했다. 1905년, 이토우 히로부미 통감은 제2차 일한협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았다. 또한 1906년에는 조선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확립하는 것을 중심으로 시마네현 마쓰에시(松江市)출신의 우메 켄지로(梅謙次郎)가 한국정부 법률고문에 취임했다.

우메 켄지로(梅謙次郎)는 1860년에 마쓰에시 사이카마치(雑賀町)에서 태어나, 15세에 상경해 동경외국어학교, 사법성(司法省)법학교에서 공부, 프랑스 리용대학,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 귀국 후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교수가 되어 민법을 중심으로 연구를 계속해 「민법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우메(梅)는 대학교수면서 일불법률학교(和佛法律学校, 현재의 법정대학=法政大学) 교장도 역임했다. 이 학교의 시마네현 출신자와 기타 법조계・정계・경제계에서 활약하는 시마네현 출신자로 시마네현 법정회(島根県法政会)라는 것이 조직됐다. 회장은 우메 켄지로(梅謙次郎), 부회장은 변호사인 기시 세이이치(岸清一), 회원으로는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礼次郎) 등이 있다.

우메 켄지로는 이토우 히로부미의 신뢰를 얻어 1892년에 일본의 민법상법시행취조위원(取調委員)에 취임하여 1893년부터는 법전조사회(法典調査会)위원으로 이토우 총재를 도와 민법, 상법 등의 법전편찬에 임했으며, 나아가 1898년부터는 제실(帝室)제도조사국 어용(御用)담당으로 황실전범(皇室典範)의 기초(起草)를 담당했다. 1906년 당시, 47세였던 우메는 한국정부의 법률고문취임 요청이 있었다.

우메는 시마네현 법정회의 간사인 야마구치 케이이치(山口慶一)를 보좌관으로 삼아 6월 17일에 시마네현 법정회의 성대한 송별회 후, 한국으로 건너갔다. 7월 21일자「산인신문(山陰新聞)」에「우메 법학박사가 담당해 조사하는 사항은 거의 한국전체의 법률제도에 관해 그 범위가 매우 방대하며, 다시 말해 왕실제도조사를 통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의 기초(起草), 민형법 창설, 재판소구성법 및 지방제도 조사 및 설정, 기타 조세제도에까지 이른다」며, 전반적인 법률작성에 임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우메도 이토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의욕이 충만해 8월 11일에 한성(서울)에서 열린 시마네현간담회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저는 이미 동경에서 조직된 시마네현 법정회에서 한국경영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마쳤다」며, 이 모임의 회원이자 먼저 부산영사로 취임한 사카다 쥬지로(坂田重次郎)에게 폭 넓은 조사를 시켰음을 피로했으며, 머지않아 완성될 조사보고에 대해 「여러분은 이를 참고로 삼아, 한국경영의 길을 강구한다면 그다지 큰 어려움은 겪지 않을 것」이라며, 시마네현민에게 제언도 하고 있다.

이 우메다의 제언은 바로 시마네현으로 전달되어 1907년도 시마네현의 권업자산(勧業予算)에는 4000엔의 한국기업보조비가 계상되었으며, 시마네현이 발기하고 관민 각 50%의 산인도산업주식회사(山陰道産業株式会社)도 설립됐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황제인 고종의 미라가 일본의 침략과 제2차 일한협약의 무효를 열국에 호소하는 소위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다.

이토우 통감은 고종을 황제에서 퇴위시키고, 7월에 제3차 일한협약을 체결했다. 이토우 통감은「신협약은 내정(内政)상의 감독을 강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협약 제5조에는「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것(統監ノ推薦スル日本人ヲ韓国官吏ニ任命スルコト)」이라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바로 시마네현 법정회의 타와라 마고이치(俵孫一)가 학부차관으로, 후에 시마네현 지사가 되는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시총감에 해당하는 한국정부 경무고문에 취임했다.

1909년 6월에 이토우 히로부미는 통감을 소네 아라스케(曽禰荒助)에 물려줬지만, 같은 해 10월에 방문한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됐다. 이토우는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 없다, 합병은 매우 성가시다, 한국은 자치가 필요하다」가 지론이었으며, 우메도 「새로 기초(起草)해야 할 민법은 한국인만을 위한 것」, 「이 형법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 기록하도록, 일한병합을 생각하지 않는 시책을 모색했었다. 우메는 1910년 8월에 한국에서 사망한다. 같은 해 8월에 일본정부에 의한 일한병합이 단행됐다.

2.시마네현 상업학교와 한국인 교사
1900년 4월에 마쓰에시에서 유일한 현립상업학교로「시마네현상업학교(島根県商業学校)」가 개교했다. 학교규칙 제1조에는「내외상업에 관한 필수교육을 실시해, 적합한 상업자 육성을 지향한다」고 되어 있다. 초대 교장은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하시모토 모토이치(橋本基一)로 적극적으로 학교의 기초 만들기에 노력했다.

1903년 4월에 하시모토는 커리큘럼을 개정해 자율과목 중에 한국어과를 마련했다. 주 2시간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서의 실업에 보탬이 되게 함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한국어교사로 채용된 게 안영중(安泳中)이라는 인물이었다

안영중은 교토부립(京都府立)상업학교의 한국어교사였는데, 1902년 9월에 시마네현을 방문했었다. 「이번 달 5일에 한국 망명자인 안영중이 시마네현 마쓰에시 미나미관에 투숙합니다, 이 사람은 박영효 등과 친교가 있어 교토에서 24, 5명의 학생을 양성 중인 사람으로, 자금이 부족해 돌아다니며, 산인지방을 만유하는 길에 올라 박영효의 휘호품 및 자신의 휘호를 유지에게 팔기 위해 마쓰에에 온 사람으로, 약 1주일간 체재하면서 시마네현 히카와군 기츠기쵸 지방을 만유한다는 내용을 말씀드리는 바이며, 특별히 수상한 거동이 없는 까닭에 이에 보고하는 바입니다.

(本月五日韓国亡命者安泳中カ県下松江市皆美館ニ投宿候処、同人ハ朴泳孝等ト親交アル由ニテ、京都ニ於テ二十四五名ノ学生ヲ養成中ナルモ、資金ニ乏シキヲ以テ這回、山陰地方漫遊ノ途ニ上リ朴泳孝ノ揮ごう品並ニ自分ノ揮ごうヲ有志ニ買受ケ貰ハン為メ来松シタルモノニシテ、凡ソ一週間滞在ノ上、県下簸川郡杵築町地方漫遊スル旨申居リ、別ニ怪ムヘキ挙動無之、此段及報告候)」라며, 시마네현 지사인 가나오 료우곤(金尾稜厳)이 외무대신인 코무라 쥬타로(小村寿太郎)에게 9월 6일자로 제출한 보고서이다.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조선에서도 실현하기 위해 김옥균 등과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영효는 실패하고, 많은 동지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었다. 안 영중은 본국에서 지명수배당한 정치범은 아니었지만, 일본국내에서 박영효나 아사히쥬쿠(朝日塾)라는 쥬쿠(塾)에서 배우며 생활하는 조선인 청년들 지원에 노력했다. 이 안영중이 하시모토교장의 요청에 응해 다음 해 한국어 교사로 마쓰에시에 다시 나타났다. 시마네현 상업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현재의 시마네현립 마쓰에상업고등학교의 교사(校史)에는 일본어가 유창하고 교육에 열심이었던 안선생의 추억을 당시의 생도가 말하고 있다.

안영중은 마쓰에시민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한시(漢詩)결사인「센쇼우긴샤(剪淞吟社)」에도 참가해 수많은 시를 만들었다. 부임하고 2년째에 일러전쟁이 발발했다. 센쇼우긴샤(剪淞吟社) 정례모임에서 「전승축하」라는 제목으로 6명이 7자의 한자로 한 행씩 짓는 연구(連句)가 그 자리의 주제로 나온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병사들의 분전, 한명이 천명을 상대한다(我兵奮戦一当千)」와 같은 직접적인 전쟁터 모습을 표현했지만, 5행 째를 담당한 안영중은 「남아는 뜻을 세우고 이를 굳건히 한다(男児立志是固然)」라며, 다른 타인과의 연대를 중시하면서도 전쟁을 언급하지 않고 시를 지었다.

시마네현대학 명예교수 고 이리타니 센스케(入谷仙介)씨는 그의 저서인『산인의 근대한시(山陰の近代漢詩)』에서「조국의 지배를 둘러싸고 싸우는 전쟁이 한창인 때, 전승에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고통이 안영중의 시 속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안영중은 1905년에 시마네현을 떠나, 같은 해 8월부터 1907년 3월까지 나가사키고등상업학교(長崎高等商業学校, 현재의 나가사키대학=長崎大学)의 한국어교사를 역임했다.

이때 그는『한어(韓語)』라 이름 붙은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알기 쉽다는 평판을 얻어 (일본)전국의 상업학교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1907년에 정치범인 박영효가 대한제국정부의 특사로 귀국하게 되자 안영중도 동행해 귀국했다. 1909년 9월에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山口高等商業学校, 현재의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学)으로부터 교사 요청을 받아 다시 일본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병마에 시달린 몸이라 야마구치 아카가와병원(赤川病院)과 교토의과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1910년 11월에 휴양을 위해 조국으로 향했지만 부산에 도착한 직후에 사망했다. 향년 41세였다.

시마네현 상업학교에서는 안영중 후에 현헌(玄憲), 정인기(鄭寅埼), 이종식(李種植)이란 한국인교사가 봉직했다. 모두 열혈교사로 생도들은 큰 영향을 받아 조선본토에 취직하는 자도 연이었다. 안영중을 초청한 하시모토 교장도 1906년에 신설된 조선의 부산상업학교 교장으로 조선으로 건너갔다. 

3.오쿠무라 마사아키(奥村正彬)의 「울릉도도(鬱陵島図)
최근 시마네현 내에서 울릉도를 그린 족자가 발견됐다. 그림 좌측 위에「울릉도정취 메이지 신해 겨울의 울도<후략>(鬱陵島情趣 明治辛亥仲冬遊鬱島、洞道写其奥景)」이라 되어 있고, 마쓰에 주민 오쿠무라 마사아키(奥村正彬)라 되어 있다. 오쿠무라 마사아키는 아마도 어렸을 적 이름이 오쿠무라(奥村正之助)이었던 현재의 마쓰에시 카가(加賀)의 오쿠무라 헤이타로(奥村平太郎)의 남동생이라 생각된다.

오쿠무라 헤이타로는 1898년경 웅비의 꿈을 품고 울릉도로 건너가 어패류 통조림생산을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후 울릉도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울릉도우회(鬱陵島友会)」를 결성해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지만, 이 제3회에 당시 시마네현 총무과 직원으로 다케시마(독도) 연구자였던 타쿠라 세이자부로(田村清三郎)씨가「선인의 족적(先人の足跡)(메이지37・8년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기고하고 있다. 이 안에 1905년(메이지38년)부터 전복통조림이 울릉도 수출품에 더해졌다고 하고 있다. 이 해는 10상자 96엔어치에 그쳤지만 1상자 4타스로 1캔 당 20전의 시세로 계산되고 있다.

오쿠무라 헤이타로와 그의 양자인 오쿠무라 료우(奥村亮)는 바로 전복채취를 다케시마(독도)로도 확대, 다케시마(독도)에서의 어업권을 가진 오키(隠岐)의 야와타(八幡長四郎) 등으로부터 돈으로 어획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 있다.

이 울릉도 오쿠무라집안으로 메이지 신해년(辛亥年), 다시말해 1911년에 일한병합 다음 해에 오쿠무라 헤이타로의 남동생인 오쿠무라 료우의 숙부에 해당하는 오쿠무라 마사이키가 방문한 것이다. 오쿠무라 마사아키, 어릴 적 이름이 (正之助)에 대해서는 오쿠무라 료우의 수기에 지역 주지 중에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있어 마사아키가 그 사람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 주지보다 능숙해져 주지의 추천으로 동경 야마오카미화(山岡未華)의 문하생이 됐다고 한다. 족자의 도동(道洞)항에서 본 성산봉의 웅장한 모습을 중심으로 한 그림은 역시 초보자가 그린 것이 아니라 치밀한 붓놀림을 느낄 수 있다. 

당시의 울릉도는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의 『다케시마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에 실린 1906년에 조사된 일본인수는 96가구 303명으로, 시마네현 사람이 물론 많아 64가구 218명으로, 도동에는 이 가운데 51가구 181명이 살고 있었다. 족자 상단에는「풍일청명동해중<후략>(風日清明東海中 三峰岌●(やまに業)●(てへんにてのひら)青空 黄膓柊剰鬱陵島 點々節夜太古月)」이라는 한시가 달필로 쓰여 있다. 시는「풍일청명(風日清明)」,「정동중(正東中)」, 「삼봉급업(三峰岌業)」등, 『세종실록지리지』와『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된 울릉도에 관한 유명한 표현이 도처에 새겨져 있어 감성보다 지성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통감서호(統監西湖)는 소네 아라스케(曽禰荒助)를 가리킨다. 1909년 4월 25일자「황성신문(皇城新聞)」에 4월 23일에 소네가 울릉도를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소네는 초대통감인 이토우 히로부미 아래의 부통감이었지만 같은 해 6월부터 제2대 통감으로 취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네의 시(詩)를「배영박근사(裴泳璞謹写)」라고, 족자에 옮겨 쓴 인물명이 실려있다. 배영박은 울릉도 공립학교의 교사였다는 게 1923년 2월 17일에「동아일보」기사로 알 수 있다. 신문기사의 내용은 울릉도에 있었던 사립 명덕강습원(明徳講習院)이 경영난에 빠지자 공립학교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무보수로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학교존속에 협력, 주위로부터 찬사의 소리가 드높다는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다.

오쿠무라 마사아키의 그림, 소네 아라스케의 한시, 배영박의 글이 어떤 접점을 갖는지는 불명확하다.  


『안영중(安泳中)의 글』(개인소장)


『오쿠무라 마사아키(奥村正彬)의 「울릉도도(鬱陵島図)」』(개인소장)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0.08.09

2010.09.25. 독도본부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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