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07-04-23

신라의 우산국 정벌

신라의 우산국 정벌


고대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독도의 사정을 짐작할수 있는것은 「三國史記」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우산국(于山國) 관련 기사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이다.



울릉도의 옛 주인인 우산국인의 계통 및 국가 발전단계, 문화수준의 정도는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으나 지리적인 요건으로 육지의 제국가와의 교류가 원활하진 못하였지만 우산국왕 우해가 대마도를 공격하여 대마도주의 딸을 데려 왔다는 전설과 , 신라군의 우산국 정벌시 힘만을 앞세운 공격이 아닌 교묘한 계략을 구상했어야 했다는 것을 볼때 그들은 오늘날 울릉도, 독도등지를 포함한 도서지역과 그를 둘러싼 바다 및 동해안 일대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해상세력의 국가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우산국은 바다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하고,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수량 및 진귀한 나무, 풍부한 해산물의 다량산출로 풍족한 생활을 영유하는 半漁半農人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하슬라주(溟州-강릉지역)의 군주인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복속이 된다.



(지증왕) 13년 6월 우산국이 귀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 동쪽바다의 섬에 있는데 혹 울릉도(鬱陵島)라 이름 하기도 한다. 땅이 사방 백리인데 험함을 믿어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었는데,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므로 계책을 써야 한다”하였다. 이에 나무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으로 갔다. 그 나라의 해안에 도착한 후 신라군은 우산국인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서 모두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곧 항복하였다.



우산국인들은 해마다 신라에 토산물을 바치고, 신라인의 왕래가 편리하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한 문화의 교류로 인해 신라의 문화가 우산국내로 활발히 유입되게 된다.

울릉도(우산국)이 일찍부터 본토의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문헌뿐 아니라 고분출토유물로 추정되는 동관편 즉 위세품의 양식과 고분군의 축조 및 공반 출토되는 신라토기등 고고학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삼국사기의 기사를 통해 적어도 서기 5c 에는 울릉도에 해상세력을 주축으로한 집단이 이미 살고있었고 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그들을 정벌하여 본토와의 정식내왕이 6c초 부터는 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우산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본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통치하였는지에 관한 직접적 증거자료는 없으나 주현의 설치를 통한 직접적 통치이거나 , 토착세력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간접통치 이었던간에 신라 하대에 와서 지방에 대한 통제는 무너지고, 각 지방의 호족세력의 등장과 함께 우산국 역시 반독립 상태에 놓였을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우산국은 통일신라 및 고려에 이르기까지 신라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함으로 수준높은 해양문화를 창조하였을 것이다.

  기사입력시간 : 200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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