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07-08-17

해외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서<2>

 中 - 사라질 위기 놓인 항일의 자취 

 

 

 ▲ 日 총영사관 감옥 이육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잃은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철거 공고문이 붙어 있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중국 내에는 아직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항일운동 유적지가 있으나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특히 적잖은 유적이 대도시에 자리한 탓에 최근 일고 있는 대규모 도심 재개발 바람 속에 자칫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된다.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와 조선의용대 출신 이원대 열사 등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은 현재 베이징 중국 사회과학원 뒤편의 좁은 골목에 위치한 둥청(東成)구 둥창후동(東昌胡同) 28호에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하지만 베이징 중심가에 위치해 개발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울 명동처럼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인근에 있는 까닭에 대형 쇼핑몰 개발소식이 끊이지 않고 건물 외벽 곳곳에 철거 공고가 나붙어 있다. 현재 건물주가 베이징시 정부와 보상비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타결만 되면 곧바로 철거될 운명이다.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한독당과 의열단 등 5개 단체가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한 상하이(上海) 친젠뤼서(勤儉旅社) 여관은 이미 재개발로 허물어졌다. 임시정부 충칭(重慶) 시대 세 번째 청사였던 우스예항(吳師爺巷)의 허름한 2층 목조 가옥 주변도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송병조(1877∼1942) 선생 등 독립투사들이 묻혀 있다는 충칭 한인묘지도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했다.


충칭 위중(?中)구 쩌우룽로(鄒容路) 37호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도 10여년 전부터 재개발된다는 소식이 무성해 언제 헐릴지 모른다. 이 건물 주변도 낡은 건물뿐인데,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현대식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조만간 주변의 낡은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1층에 식당이 들어선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은 아직 건재한 상태이지만 수년 전부터 재개발 소식이 끊이지 않아 언제 철거될지 알 수 없다.



▲ 치장 임시정부 청사 주변 치장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중국 충칭시 치장현 퉈완 8호 주변에 중장비와 트럭 등이 동원돼 대규모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청사 자리에는 올해 초 서민용 아파트가 들어섰다.


일본 총영사관 감옥과 광복군 총사령부는 아직까지 남아 있지만 치장(?江) 임시정부 청사의 경우 아쉽게도 2년 전 재개발로 사라졌다.


이곳은 치장에 일고 있는 건설 붐을 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현재 공사가 모두 끝나 입주만 남은 상태이고 주변도 급격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중국 전체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감안하면 유적지 소재 파악만으로는 부족하고 보존 상태, 재개발 소식 등까지 폭넓게 파악해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며 “유적지를 우리가 매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적극적인 합작 투자와 관리 분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 구자운씨가 현지 박물관에서 찾아낸 임시정부 관련 중국신문 기사를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들 하잖아요. 그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쓰신 선조들의 얼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면 그걸로 족합니다.”


우리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가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가운데 한 민간인이 이들 유적지의 보존·발굴에 정성을 쏟고 있다.


LG전자 협력업체인 삼창기업의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지역 경영고문인 구자운(47)씨. 구씨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아마추어 역사학자’로 변신해 지역 내 항일 유적지를 찾아 나선다. 그는 2001년 처음 중국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에 관심조차 없었다. 2003년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이 지역의 난무팅(楠木廳)을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난무팅을 직접 찾은 그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처음에는 표지 하나 없이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돼 있어 실망했죠. 하지만 이곳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피땀 흘린 선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오더라고요. 그게 역사연구로 이끈 것 같아요.”


이후 그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록과 백범일지 등을 탐독했다. 창사임시정부 시절인 1937년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당시 중국 신문자료도 확인했다. ‘조선’이나 ‘한국’이 들어간 기사는 무조건 복사했다.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가 50여건에 이른다. 창사 지역 독립운동사만큼은 학자 못지않은 지식을 갖게 됐다. 지인은 물론이고 관광객이나 학생들에게 이 지역에 깃든 항일역사와 정신을 알리는 ‘역사 전도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구씨는 “중국은 땅이 넓고 유적이 많아 한국 정부에서 항일유적지 보존을 위해 사람을 보낼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러면 주재원이나 교포, 조선족 등을 ‘현지 관리인’으로 지정해 유적 관리와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하면 지금처럼 마냥 폐허로 방치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특히 “몇 년에 한 번씩 들러 독립운동 관련 보고서를 내고 ‘이미 없어졌다’, ‘확인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며 “소중한 역사의 현장을 되살리기 위해선 현지인과 유기적인 소통을 통해 유적지 발굴과 보존에 힘써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치장 臨政청사·백범 살던 곳 아파트 들어서

中 현지 유적 답사기  




 중국 내 항일운동 유적지 답사를 위해 지난 2일 오후 인천공항을 떠난 지 3시간 만에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공항에 닿았다. 창사는 ‘모래의 바다’라기보다 ‘안개의 바다’였다.

‘1938년 백범도 짙은 안개를 뚫고 창사에 왔을까?’ 69년 전 조국의 독립을 기약하기에는 너무도 불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중국 남부 각지를 떠돌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행로는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막막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백범 김구 선생이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회의 도중 권총 테러를 당한 난무팅(楠木廳) 건물부터 찾았다. 현지인들과 택시기사는 “난무팅을 아느냐”는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난무팅 위치를 알고 있다는 한국 대기업 협력업체 현지 주재원 구자운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다음날 답사에 나섰다. 창사 시내 번화가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골 장터 같은 작은 가게들이 즐비한 지저분하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지은 지 20년이 지난 낡은 저층 아파트가 양편으로 늘어선 골목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오래된 2층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1800년대 청나라 고관대작의 대저택이었다는 난무팅 일대는 이미 재건축이 이뤄져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조선혁명당 본부였던 난무팅 6호만은 1900년대 초반 건축양식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역사적인 현장을 찾았다는 설렘과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목조건물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백범이 총탄을 맞았다는 2층 방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세간살이가 가득 차 있었다.


다음으로 창사에서 8개월간 임정 청사로 사용된 시위안베이리(西圓北里)를 찾았다. 난무팅에서 1㎞가량 떨어진 그곳 역시 낡은 목조건물이 늘어선 미로 같은 좁은 골목 막다른 곳에 있었다. 청사 건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신 그 자리에 아파트 네 동이 세워져 있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당시 건물이 그대로 있었는데 몇 해 전 재개발로 없어졌다”는 현지 주민의 증언이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목적지를 충칭(重慶)으로 향해 창사를 떠났다. 1939년 4월부터 이듬해까지 임정 요인들이 머물렀던 충칭 인근의 치장(?江)현 현장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충칭 도착 후 차로 1시간을 달려 치장에 도착, 임정 청사 자리를 찾아갔으나 재개발로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2년여 전만 하더라도 옛 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 중국 정부와 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임정 청사 옆 백범이 살았던 집도 일부가 아파트 부지로 편입됐고, 나머지 빈터에는 폐 타이어만 높게 쌓여 있었다.


충칭 시내로 들어가 1940년부터 해방까지 임정 요인과 그 가족이 머문 투차오(土橋) 한인촌을 찾아갔다. 무성한 잡풀과 벽돌 무더기만이 이곳이 집터였음을 알려줬다.


마을 인근에 철강공장이 들어서 화시향(花溪鄕) 화시촌이라는 옛 지명도 리자퉈투차오(李家?土橋)로 바뀌어 있었다. 마을 아래 있었다는 둥칸(東坎)폭포도 도로와 댐이 들어서면서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이 아직껏 남아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1층에는 웨이위안(味苑)이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건물 외벽과 2층 사무실, 3층 망루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좁은 나무계단을 따라 망루에 올라서자 마당에서 훈련했을 광복군들의 우렁찬 함성이 전해지는 듯했다.


인근 충칭임정기념관은 꽤 깨끗하고 정결했다. 90년대 초반 재개발 소식이 들리자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유적지로 복원된 이곳은 건물 외부에서부터 내부까지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5동 규모의 이곳은 중국 내 임정기념관 중 가장 규모가 크지만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있다”는 이선자 부관장의 말에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이어 상하이(上海)를 거쳐 광복군 제3지대가 주둔한 안후이(安徽)성 푸양(阜陽)까지 기차로 이동했다. 3지대 주둔지는 푸양 시내에서 18㎞가량 떨어진 자오펑촌(趙朋村)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20가구 남짓한 마을에는 작고 오래된 흙벽집이 대부분이었는데 광복군 대원들이 거주했던 집은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상당수 주민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살다가 일본 패망 후 귀국한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98년에는 생존한 광복군들이 이곳을 찾아 주민들과 옛 추억을 나눴다고 한다.


현지 한 노인은 “중국말을 쓰고 옷도 중국옷을 입어 당시에는 그 들이 한국인이라는 걸 몰랐는데 이후에 찾아와 한국인이었음을 알았다”며 “그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운 기억이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당시 광복군은 일본군에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중국인으로 위장해 활동했다고 한다.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의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를 마지막 답사지로 잡았다.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 부대로서는 처음으로 중일전쟁에도 참전했고, 이후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편입된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진 곳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허페이(合肥)를 거쳐 6시간 만에 우한에 도착했다.


현지 교육청 도움으로 우창(武昌)지구에 있던 다궁(大公)중학교가 역사적인 그곳임을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다궁중학교는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학교 터에는 성총공회처(省總公會處)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을 연병장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담금질을 했을 조선의용군의 기개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선의용대가 첫발을 뗀 소중한 이곳에 하루빨리 기념 표석이라도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사회부 기동취재팀=김동진 팀장·유덕영·장원주 기자  세계일보 2007.02.28 (수) 18:54 

  기사입력시간 : 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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