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07-08-30

100년 전 ‘헤이그 밀사’를 기억하는가

 






    • ▲헤이그로 파견된 세 밀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 1907년 6월 25일, 멀리 극동의 대한제국에서 온 세 명의 밀사(密使)가 네덜란드 헤이그 땅을 밟는다.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그리고 이준(李儁)이었다. 고종 황제의 친서를 몸에 지니고 열흘 전부터 열리고 있던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의 불법 행위를 알리려던 그들의 계획은 열강의 냉담함 속에서 좌절된다. 7월 14일,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憤死)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8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이준열사 순국 백주년기념 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한 학술대회 ‘이준 열사와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한국근대사 전공자인 정숭교 박사(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기존에 알려진 이준의 행적 중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1859년 함남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됐다가 아관파천으로 인해 1개월 만에 물러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알려진 것처럼 귀국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일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의연금을 모금해 일본군 부상자를 돕자는 ‘동지권고문’을 발표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태형을 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그의 생각은 극적으로 바뀐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이준은 이 무렵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상동청년회’의 을사조약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평리원 검사가 된 그는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던 기산도(奇山度)의 사면 문제로 친일 대신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투옥된다. 정 박사는 “점차 노골화되는 일제의 침략이 그를 반일 투사로 변신시켰다”며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온 몸을 던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는 15일 오전 10시 백주년기념관에서 국제학술대회‘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대한제국 그리고 열강’을 개최할 예정이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일보  2007.06.09 02:07

      기사입력시간 : 200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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