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역을 답사했을 때 그 감흥이 오래가는 지역이 있다.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갈석산(碣石山)이 그런 곳이었다. 일반에게는 생소하지만 갈석산은 고조선의 강역 비정에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북한 지역을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고조선 수도에 한(漢)나라의 식민 통치기관인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도 고구려가 평양에 있던 낙랑군을 몰아낸 후 남쪽으로 진출했다는 식으로 ‘낙랑군=평양’을 전제로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평양’ 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인데, 해방 후에 이병도(李丙燾) 교수가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1972)’ 같은 책에서 계속 이를 지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정설(定說)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사료를 살펴보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이병도 교수는 ‘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에 비정했다. 이는 수성과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지극히 소박한 이유에서였지만 현재도 어떤 학자들은 이 학설을 무작정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나라 정사인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는 갈석산이 버티고 있어, 평양이 아니라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음을 몸으로 증거한다. 진시황과 조조를 비롯해 9명의 황제가 올라서 유명한 갈석산에 한번 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의 영역이라는 동북공정의 논리는 이 갈석산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이덕일 ·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조선일보 2006.11.0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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